신앙과 공동체, 역사의 산증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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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형기 님의 이야기
신앙과 공동체, 역사의 산증인

신앙의 뿌리: 어머님의 유산

박형기 장로의 신앙은 어머니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어릴 적부터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추운 날에도 새벽 기도를 다니시던 어머니의 모습을 보며 자랐다고 회고한다. 어머니의 고향인 청송에는 교회가 없었으나, 시집와서 성법교회에 다니기 시작했고, 그 새벽 기도의 모습은 지금도 장로님의 기억에 가장 선명하게 남아있다. 박 장로는 그 어머니의 기도가 자신의 신앙의 뿌리가 되었다고 믿으며, 지금도 어머니의 믿음을 따라 힘닿는 데까지 새벽 기도를 다니며 신앙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그의 굳건한 믿음은 어머니가 남겨주신 소중한 유산임을 강조하며, 그 신앙을 지켜나가는 것이 삶의 중요한 부분임을 밝혔다




가족과 믿음의 계승

박 장로는 자신의 가족, 특히 아내 이 권사님에 대한 깊은 존경심을 표했다. 1973년 11월 15일에 결혼한 이 권사님은 시집 온 이튿날 시어머니를 따라 낯선 교회에 가는 것이 매우 어려운 발걸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묵묵히 동행하며 지금까지 신앙생활을 이어왔다. 그는 이러한 아내의 헌신적인 믿음에 대해 늘 칭찬해주어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삶 속에서 잘 되지 않는다고 겸손하게 덧붙였다. 자녀들에 대해서도 언급했는데, 큰딸 박은정은 경주에서 교회를 잘 다니고 있으며, 외손녀들도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다고 전했다. 다만, 아들 부부와 그들의 자녀(손주 박수진)는 코로나19 이전에는 포항 중앙교회에 잘 다녔으나 요즘은 뜸한 것 같다고 솔직하게 이야기하며, 자녀들이 계속해서 교회를 열심히 다니기를 바라는 마음을 드러냈다. 그는 후대들이 믿음 안에서 건강하고 잘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덧붙였다.

봉사와 공동체의 역사

성법교회는 박 장로의 어머니가 열심히 봉사하시던 교회이며, 그 역시 평생을 섬겨온 곳이다. 그는 과거 교회의 모습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데, 옛날에는 전기가 없어 호야 등(기름등)을 사용했으며, 청소 당번이 되면 깨지기 쉬운 유리 등을 닦는 것이 매우 힘들었다고 회고했다. 당시에는 수요일까지 청소를 했고, 집사 직분을 맡은 이들은 집안일보다 교회 일을 우선할 정도로 믿음이 투철했다고 전했다. 현재 교회의 리모델링은 최근의 일이지만, 1971년에 한 차례 큰 리모델링이 있었고, 당시 그는 군 복무 중이라 자세히 알지는 못한다고 했다. 특히 교육관을 지을 때는 지금처럼 레미콘 차가 없어서 온 동네 주민들이 힘을 합쳐 서까래를 올리고 건물을 지었다며, 옛날에는 마을 사람들이 교회의 일이라면 전체가 나서서 협조하고 일을 도왔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요즘은 살기가 좋아져서 그런 협력이나 인정이 많이 사라진 것 같다고 아쉬움을 표현했다.



기억에 남는 추억과 교회의 변화

박 장로는 오래된 교회 생활 속에서 다양한 기억에 남는 일들을 떠올렸다. 100년사 책자에 일부 잘못된 내용이 있을 수 있다고 지적하면서도, 선교사들이 드럼통에 우유를 가져와 주일마다 교인들에게 나누어주던 기억을 언급했다. 또한, 옛날에는 도로가 비포장도로였으며, 요즘의 영화나 TV가 없던 시절에는 '활동사진'이라고 불리던 이동식 영사기가 큰 구경거리였다고 전했다. 대구 동산병원에서 재료를 가져와 박경만 씨 등이 상영했던 모세의 일기 같은 성경 관련 영상은 아무리 추운 겨울에도 동네 사람들이 문을 다 열고 들어와 구경할 정도로 인기가 많았으며, 지금도 그런 것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소망했다. 그는 자신이 태어날 때부터 어머니를 따라 교회를 다녔을 것이라 짐작하며, 아주 어릴 때부터 어머니의 새벽기도를 따라다녔다고 말했다. 또한, 농촌 교회가 되면서 사람들이 시내로 빠져나가 신도 수가 줄어들어 목사님들이 어려움을 겪는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도 드러냈다. 믿는다는 것이 세상 사람들에게 조롱거리가 될 때도 있고, 모임에서 말을 조심해야 하는 어려움도 있지만, 평생 믿어왔기에 이제 포기할 수 없으며 하늘 가는 그날까지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다짐했다.

기쁨의 순간과 영적 체험

장로님의 신앙생활에는 기뻤던 순간들도 많았다. 옛날 집회 때는 사람들이 손뼉 치고 춤추며 뜨겁게 예배를 드렸던 것을 기억하며, 젊은 시절 백 집사님이라는 분이 집회를 인도했을 때, 사람들이 자동적으로 춤을 출 정도로 은혜가 넘쳤다고 회상했다. 요즘은 그런 집회를 하는 사람이 드물고, 신사적으로 교회를 다니는 분위기라고 덧붙였다. 특히 기억에 남는 일화로, 이 권사님이 집사 시절 집회 중에 천국을 다녀온 경험을 들려주었다. 쓰러져 사닥다리를 타고 천국을 구경하러 가던 중, 초대 장로님 박원석 장로님이 쓰러진 그녀를 염려하여 깨우는 바람에 천국을 구경만 하고 돌아왔다는 흥미로운 이야기를 전하며, 그 경험 이후 이 권사님이 교회를 더욱 열심히 다닌다고 설명했다. 박장로는 남자들보다 여자들의 믿음이 더 좋고 기도를 오래 한다며 여성들의 굳건한 신앙을 높이 평가했다.



교회를 지켜온 믿음의 선배들

박 장로는 교회의 역사를 지켜온 믿음의 선배들에 대한 존경심을 표했다. 옛날에는 교회 교육자들(전도사)에게 생활비 대신 쌀(성미)을 드렸는데, 그 쌀을 팔아 자녀들 학비를 댔을 정도로 열악한 환경이었다고 설명했다. 특히 강철수 장로님은 외벽 리모델링 당시 집에서 직접 브로크(벽돌)를 찍으며 손이 터지고 반창고를 감으면서도 헌신적으로 일하셨다고 기억했다. 황칠순 목사님은 아주 옛날 여러 교회를 순회하며 목회를 하셨는데, 차도 없이 밤낮으로 다니시며 고생하셨던 분으로 기억에 남는다고 전했다. 가장 감동적인 일화는 6.25 전쟁으로 교회가 불탄 후, 포항 경찰서에서 교회를 없애려 할 때 그의 할아버지 김순순자 형자 할아버지가 걸어서 포항 경찰서까지 가 서장에게 사정하여 초가집이라도 만들어 교회를 유지하겠다고 간청하여 교회를 지켜냈다는 이야기였다. 또한, 사라호 태풍으로 교회 당회록이 유실되었던 아픈 역사도 언급하며, 박원석 초대 장로님의 아들인 박경화, 박경보 씨가 매우 똑똑하여 각기 한국인 최초로 일본에서 통역 없이 목회하고, 미국 동산병원에 스카우트되어 영어를 가르쳤던 일화도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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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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