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성복 님
1947년 02월 12일에 핀 꽃
박성복 님의 이야기
박성복
부모와 성장기(1)
나는 1947년 2월 12일, 포항 기계면 소금실에서 태어났다. 호적에는 2월 11일로 올라가 있지만, 실제 생일은 하루 뒤였다. 그 시절엔 그렇게 되는 일이 많았다. 여섯 남매 중 셋째였고, 집안 형편은 넉넉지 않았다. 그래도 봄이면 송피나무 껍질을 벗겨 죽을 쑤어 먹던 그 기억이, 이상하게도 살가운 유년으로 남아 있다. 배는 곯았지만 마음까지 허기지진 않았다. 1955년, 여덟 살에 초등학교에 입학해 1960년 졸업. 중학교를 마친 건 1963년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나는 공부를 꽤 성실히 했다. 우리 부모님은 교육에 있어서는 결단력이 대단했다. 쌀을 팔고, 송아지를 팔고, 논을 조금씩 늘려가며 자식들 공부를 포기하지 않으셨다. 지금 생각하면, 아버지는 요즘 말로 하면 '투자자'였고, 어머니는 행동하는 실천가였다.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아버지가 탈곡한 나락을, 어머니가 밤중에 몰래 훔쳐 외가에 팔아 등록금을 마련하신 일이다. 빗자루로 자루를 들어올리며, 남편 모르게 자식들 학비를 챙기던 그 장면은 지금도 생생하다. 새벽에 나락이 줄어든 걸 본 아버지는 눈치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다. 모른 척해준 그 침묵 속에, 두 분이 같은 방향을 보고 있었다는 걸 이제는 안다.


부모와 성장기(2)
어머니는 늘 말수가 적고 단호한 분이셨다. 동네에선 어머니를 '샛바람'이라 불렀다. 포항 지방에서 가장 매서운 북동풍의 별칭이다. 그만큼 강단 있었고, 자식들에겐 냉정했다. 하지만 뒤에서 가장 많이 울고, 가장 많이 빚을 진 사람이 어머니였다는 걸 시간이 지나고 알게 되었다. 한 번은 여동생이 울며 말하더라. “왜 나는 중학교도 못 갔어?” 그 말에 나는 아무 말도 못했다. 오빠들 공부시키느라 여동생은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바로 일터에 나가야 했다. 그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건 너무 늦은 사과뿐이었다. 집안은 늘 빠듯했지만, 형제들끼리는 우애가 있었다. 어느 하나 모난 사람 없이 각자 제자리를 지켜냈다. 친척 누나 하나를 집에 데려와 딸처럼 돌봤던 일도 기억난다. 그 누나는 지금도 우리 집을 친정처럼 여긴다. 집안 어른들 모임이나 장례식에 빠지지 않고 참석하며, 조용히 신뢰를 쌓아간 지난 시간들이 어쩌면 내 인생에서 가장 품격 있는 시간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가난은 나의 출발점이었지만, 그것은 부끄러움이 아니라 자산이었다. 부모님의 땀과 침묵이, 내 생애 가장 단단한 바탕이 되어주었으니까.
대학을 포기하고 공무원이 되다
경북대학교 농화학과에 진학하고 싶었다. 하지만 집안 형편도 어렵고, 아버지는 대학 진학을 반대했다. 기대했던 길이 막히자 마음이 크게 꺾였다. 나는 그냥 짐을 챙겨 친구 집으로 도망치듯 갔다. 그 친구가 어느 날 조용히 말했다. “시험 한번 쳐봐라.” 무슨 시험이냐고 묻자, 공무원 시험이라고 했다. 크게 기대도 없이 원서를 냈고, 시험을 치렀다. 그런데 합격했다. 경북 전체에서 단 6명을 뽑는 자리였다. 그 소식이 서울 신문 1면에 실렸다. 내 이름도 뚜렷하게 적혀 있었다. 동네가 들썩였다. “우리 마을에서 공무원이 나왔다”며 사람들이 찾아와 축하해줬다. 그렇게 나는 공직에 발을 들였다. 원래의 꿈은 접었지만, 예상치 못한 길이 내 인생을 이끌게 될 줄은 그때는 몰랐다.
공직과 인생의 바닥(1)
1984년, 나는 도지사 발령으로 문경시 최연소 축산 계장에 임명되었다. 도내 24개 시군 중 가장 젊은 계장이었다. 포항의 양복점에서 카키색 양복을 맞춰 입고 부임하던 날, 책임의 무게보다 기대가 더 컸다. 축산과 출신으로서의 자부심도 있었고, 나에게 주어진 역할을 충분히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도 있었다. 공직자로서의 시간은 긴장과 자부심의 연속이었다. 나는 말보다 행동을 먼저 보여주고자 했다. 면장 시절, 청소 민원이 잦아졌을 때 나는 새벽 4시에 얼굴을 가리고 모자를 눌러쓴 채 청소차에 올랐다. 청소직원들과 함께 하루 종일 현장을 다니며 민원이 왜 생겼는지 지켜봤다. 그리고 마침내 원인을 파악하고, 단호한 조치를 내렸다. 책임을 지는 것이 장의 역할이라는 믿음에서였다. 그 무렵 나는 방송통신대에 입학해 6년간 전문대와 학사 과정을 마쳤다. 새벽까지 책을 붙잡고 공부했고, 졸업시험을 통과해 아내와 함께 졸업사진을 찍었다. 공직에 안주하지 않고 늘 배우고 싶었던 내 마음을, 지금도 스스로 칭찬해주고 싶다. 비록 나는 그 길을 직접 가지 못했지만, 아들은 그보다 더 큰 배움의 길을 걸었다. 아버지로서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하지만 그렇게 차곡차곡 쌓아온 삶도 한순간 무너지는 때가 오더라. 믿었던 사람에게서 시작된 일로 인해 삶의 기반이 흔들리고, 설명할 기회조차 갖지 못한 채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했던 시절이 있었다. 밤이면 스스로를 밀어내고 싶은 마음과 싸워야 했고, 그 시간을 누구에게도 꺼내 놓지 못한 채 버텨야 했다. 결국, 나를 붙든 건 가족이었다. 특히 딸의 얼굴이었다. “아버지가 그런 선택을 했다는 말을 아이 입에서 듣게 할 수는 없다.” 그 말도 못 할 결심을 막은 건, 사랑이었다. 그리고 또 한 사람, 아내였다.


공직과 인생의 바닥(2)
그날, 아내는 이렇게 말했다. “쌀밥 못 먹으면 보리밥 먹고, 고기 못 먹으면 안 먹으면 되지. 우리 한번 살아보자.” 그 말이 나를 현실로 돌아오게 했다. 비난도, 위로도 아닌, 그냥 함께 살아내자는 말. 그 한마디가 내 속을 꺼내주었다. 지금 돌아보면, 그 시절 나는 너무 철이 없었다. 억울하다고, 외롭다고, 나만 버려졌다고 생각했지만 정작 그 안에서도 나를 걱정해주던 사람들, 기다려주던 사람들이 있었다. 그걸 몰랐던 것이, 어쩌면 진짜 내 인생의 어둠이었는지도 모른다. 공직을 마무리하고 난 뒤, 마침 공공기관과 관련된 한 회사에서 제안이 들어왔고, 나는 다시 일터로 나갔다. 처음에는 그저 생활을 이어가기 위한 선택이었지만, 어느새 나는 그곳에서도 중심이 되어 있었다. 회사 매출의 절반 이상을 책임질 만큼 중요한 자리를 맡게 되었고, 대외관계 업무에서 공직 경험을 잘 살릴 수 있었다. 그렇게 19년을 더 일했다. 임금피크제를 지나면서는 프리랜서로 일했지만, 여전히 그 인연은 이어지고 있다. 남들보다 오래 일했고, 여전히 현장에 있다는 사실이 가끔은 신기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그렇게 일할 수 있었던 건 다 이유가 있었던 것 같다. 내가 나를 잊지 않기 위해서였고,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였고, 무엇보다 삶을 멈추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사람을 보면 삶이 보인다(1)
살다 보면 안다. 진짜 사람은 오래 같이 있어봐야 안다는 걸. 겉으로 보기에 좋은 사람도 시간이 지나면 본색이 드러난다. 그래서 나는 사람을 쉽게 판단하지 않는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결국 세월이 알려준다. 예전에는 겉으로 보이는 관계를 중요하게 여겼다. 명함을 주고받고, 자리를 지키고,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 그게 사람 잘 사는 거라 믿었던 시절도 있었다. 하지만 내 삶이 꺾이고, 바닥을 마주한 어느 날부터는 내 곁에 남은 사람들을 다시 보게 되었다. 조용히 찾아와 준 사람, 말없이 밥을 함께 먹어준 사람, 나를 판단하지 않고 그저 ‘사람’으로 대해준 사람들. 그중 한 분은 나보다 열 살 많은 형님이다. 그 형님은 자주 찾아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밥도 사고, 말벗도 되어주고, 내가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속마음을 그분에게는 자연스럽게 털어놓을 수 있었다. 나 역시 그 형님의 삶 이야기를 들었다. 우리는 서로의 어두운 시간까지도 나눌 수 있는 사이였다. 그분은 내게 말 없이 삶의 방향을 보여준 사람이었다. 나는 그분을 내 인생의 멘토라 부른다.


사람을 보면 삶이 보인다(2)
또 한 사람은 친구다. 내가 가장 힘들었을 때 그 친구는 매일같이 병원에 찾아와 반찬을 챙겨다 주었고, 아무 말 없이 곁에 있어주었다. 지금도 하루에 두 번씩 안부 전화를 주고받는다. 그런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내 인생은 외롭지 않았다. 그렇게 사람을 다시 보게 되면서 내 안에도 생각의 변화가 생겼다. 사람은 결국, 예의가 있어야 한다는 것. 돈이 많고 자리가 높아도, 예의가 없으면 사람은 떠난다. 나는 실제로 그런 사람들을 여럿 봐왔다. 반대로 가진 게 없어도 진심과 태도에서 예의를 지키는 사람은 결국 주변에 사람이 남는다. 그리고 나는 그 속에서 나 자신도 돌아보게 됐다. 내가 그동안 얼마나 나만 알고 살았는지, 힘들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손 내민 사람들의 마음을 다 받지 못했던 날들을 생각한다. 지금은 안다. 사람이 나를 떠난 게 아니라, 내가 먼저 닫았던 적도 많았다는 걸. 그래서 이제는 마음을 다해 감사하려 한다. 끝까지 곁에 있어준 사람들에게, 가끔 연락만으로도 위로가 된 사람들에게, 그리고 내가 다시 살아볼 수 있게 해준 그 관계들에게. 인생을 돌아보면 성공보다, 명예보다, 사람이 가장 귀했다.
자녀와 가족(1)
나는 결혼 후 가난한 살림 속에서도 아이들을 위해 할 수 있는 건 다 해주고 싶었다. 첫 집은 13평 남짓한 아파트였는데, 아내와 아이들과 오손도손 지내던 그 시절이 참 좋았다. 가진 것은 적었지만 웃음이 있었고, 땀 흘려 마련한 밥 한 끼에 서로의 정이 깊어졌다. 그 좁은 공간이 오히려 우리 가족의 거리를 가깝게 만들어줬다. 아이들이 자라면서 나는 자식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아버지이고 싶었다. 일찍부터 효도하고 싶다는 마음이 컸기에 부모님께 잘하려고 애썼고, 그것이 때로는 내 아내와 자녀들에게는 소홀함으로 비쳤을지도 모른다. 그 시절 아내가 “왜 자꾸 장남 노릇만 하느냐”고 울컥하던 모습이 지금도 기억난다. 그 말엔 일리도 있었다. 가족을 위한다는 이름으로 정작 내 가장 가까운 이들에게는 마음을 다 전하지 못했으니 말이다. 그래도 아이들은 잘 자라주었다. 아들은 대학에 진학했고, 사회생활도 잘해나갔다. 나보다도 똑똑하고 책임감 있게 사는 걸 보며 나는 늘 든든했다. 이제는 나보다 더 현명하게 세상을 살아가는 것 같아 흐뭇하다. 딸은 내게 언제나 위로였다. 말 한마디로도 마음을 알아주는 아이다. 나이가 들어가며 자식들로부터 받는 사랑과 배려가 얼마나 큰지, 이제야 실감한다. 내가 아플까 걱정해서 미리 챙겨주고, 필요하다는 말 한마디 하지 않아도 용돈을 보내주는 그 마음이 고맙다. 돈이 많아서가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정성과 사랑이 너무 커서다. 그 덕분에 나는 지금 부족함 없는 삶을 살고 있다. 내가 아이들에게 바라는 것이 있다면, 그저 건강하고 따뜻하게 살아가길 바랄 뿐이다. 나는 자식들에게 엄하게 대하려 애썼지만, 결국 내 마음속 깊은 곳엔 그들을 아끼는 마음이 넘쳐흘렀다. 살아보니, 결국 인생의 마지막에 남는 건 가족뿐이었다. 나는 그 사실을 늦게 깨달았고, 그래서 남은 삶은 자녀들에게 더 다정하고 따뜻한 아버지로 남고 싶다. 아이들 덕분에 내 삶은 더 풍성해졌고, 나는 그것으로 충분히 행복하다


자녀와 가족(2) - 아내
아내를 처음 알게 된 건 영일군에서 근무하던 시절, 보건소 여직원의 소개를 통해서였다. 포항의 한 병원에서 간호조무사로 일하던 그녀는 아름다웠고 단정한 인상이었다. 어느 날 아내와 함께 3킬로미터를 걸어 집 근처까지 내려오게 되었는데, 가난한 집안 형편이 마음에 걸려 '우리 집'이란 말도 못 하고 “물이나 한 잔 하고 가자”며 데려갔다. 그날 아버지는 아내를 보자마자 “그 여자랑 결혼해라” 하셨고, 나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 장모님의 반대가 있었지만 대구로 직접 찾아가 “제가 책임지겠습니다”라고 진심을 전했고, 며칠 뒤 아내는 홀로 하숙방까지 찾아왔다. 그 순간 나는 이 사람과 함께 살아야겠다고 결심했다. 신혼여행은 송도와 포항, 부산을 도는 소박한 일정이었다. 분홍 원피스를 입고 하이힐을 신은 채 내 옆을 걷던 아내의 모습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아내는 평생을 조용히 살았다. 아픈 날도, 서운한 날도 한 번도 큰소리 내지 않았다. 병원비가 빠듯해도 불평하지 않았고, 숨이 차오를 때도 살림을 챙겼다. 나는 그런 아내 곁에서 일에만 몰두했고, 그게 가장의 책임이라 여겼지만 사랑을 대신할 수는 없었다. 아내가 세상을 떠난 뒤, 매일 아파트 뒤편 작은 법당에서 그녀가 묻힌 방향으로 절을 올린다. 언젠가 나는 조용히 말했다. “다시 태어나면 당신의 하인이 되어 신세를 갚을게.” 그러자 아내는 짧게 대답했다. “아니야, 그건 내가 할 말이야.” 그 말에 우리 둘의 삶과 사랑, 작별이 모두 담겨 있었다.
웰다잉
삶의 끝을 준비한다는 건 생각보다 더 많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아내를 먼저 보내고 나서야 비로소 ‘잘 떠난다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어느 날 딸에게 말했다. “아버지 죽고 나면 부고장도 돌리지 마라.” 많은 사람들에게 울음을 들으며 떠나고 싶지 않다. 조용히, 내가 살아온 삶처럼 담담하게, 그렇게 가고 싶다. 그것이 내 방식의 마지막 예의이자, 나를 알고 있는 이들에게 남기고 싶은 한 마디다. 웰다잉 강의를 들었다. 그날 강사가 했던 말이 마음에 남았다. “잘 죽는다는 건, 잘 살아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 말을 들으며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많은 것을 가진 사람은 아니었지만, 내게 주어진 삶을 다 쓰고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누군가를 원망하거나, 억울함을 풀려고 애쓰지 않고, 이미 나를 알아준 사람들 안에서 작게 흔적을 남기면 그걸로 충분하다. 요즘 나는 여전히 새벽이면 일찍 눈을 뜬다. 40년 넘게 해온 108배가 하루의 시작이 됐다. 아파트 뒤편 작은 법당에서 천천히 절을 올리며 숨을 고른다. 처음엔 건강 때문에 시작했지만, 지금은 그 시간이 내 몸과 마음을 정리해주는 고요한 습관이 됐다. 덕분에 큰 병 하나 없이 살아왔다. 병원에서 골밀도 검사를 했더니 40대 수준이란다. 내 삶은 더는 미련이 없다. 이제는 욕심도 내려놓고, 남은 시간들을 내 안의 평화로 채워가고 싶다. 나는 이미 삶을 정리했다. 울지 않아도 괜찮다. 그저 나와 함께했던 시간을 떠올려 주는 것, 그것이면 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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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복 님의 인터뷰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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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복 님 방명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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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복 님의
인생 타임라인
아내 별세

민간기업 입사 (공직 퇴직 후

방송통신대학 졸업 (전문대 3년 + 학사 3년)

딸 출생

아들 출생

결혼

9급 공무원 임용
중학교 졸업
초등학교 졸업
초등학교 입학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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