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북암장로님

  • 이북암 장로님
    1900년 01월 01일에 핀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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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시작 – 찬송과 함께 열린 신앙의 문

나는 초등학교 시절, 담임 선생님의 손에 이끌려 교회라는 곳에 처음 발을 들였다네. 그때가 아마 내 인생에 있어서 가장 조용한 초대장이었지. 예배당에 처음 들어선 날, 마음이 참 따뜻했어. 그날 배운 찬송이 아직도 내 가슴에 깊이 남아있네. "고요한 바다로"라는 찬송인데, 그 찬송은 내 삶의 풍랑과 평안을 함께 담고 있었어. 처음엔 가사도 잘 모르고 멜로디만 따라 불렀는데, 세월이 흐르고 나서야 그 찬송의 깊은 뜻을 깨달았지. "큰 풍랑 일어나 나 쉴 곳 없어도 주 예수 함께 하시네" 그 가사 한 구절이 지금도 내 귀에 맴돌아. 인생이라는 게 늘 잔잔한 물결만 있는 게 아니잖아. 살다 보면 큰 풍랑도 만나고, 쉴 곳 없이 헤매는 날도 많아. 그런데 그럴 때마다 나는 그 찬송을 떠올리며 위로를 받았지. 내가 특별히 노래를 잘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누가 신앙의 첫 걸음을 어떻게 내디뎠냐고 물으면 꼭 이 찬송부터 이야기하게 된다네. 그 시절 나는 그냥 좋으니까, 예배당 나가고 찬송 부르고 그랬지. 무슨 깊은 신학이나 교리 같은 건 몰랐어. 그저 따뜻한 사람들이 있었고, 기도하는 어른들이 있었고, 아이들 웃음소리가 가득한 그 공간이 좋았던 거야.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게 은혜였어. 하나님이 내 마음을 조용히 두드리셨고, 나는 순전히 그 마음에 끌려 갔던 거지. 지금도 종종 그때 불렀던 찬송을 혼잣말처럼 흥얼거릴 때가 있어. 바람이 세차게 부는 날이면 특히 그래. 인생을 돌아보면, 참 많은 풍랑이 있었고, 또 그만큼의 고요함도 있었지. 그런데 그 모든 순간에 주님이 나와 함께 하셨다는 걸, 이제는 확실히 말할 수 있어. 그렇게 내 신앙의 첫 발걸음은, 조용히 그러나 분명히 찬송과 함께 시작되었단다.

17세 집사, 34세 장로 – 교회와 함께 성장한 청년

내가 서리집사가 된 게 열일곱 살이었어. 지금 생각하면 참 어린 나이인데, 그땐 그냥 뭐 교회에 청년들이 별로 없다 보니까, 누군가는 일을 맡아야 했거든. 그래서 나를 집사로 세운 거지. 나는 그때 재정을 맡았어. 돈을 만지려면 집사가 되어야 한다고 해서 얼떨결에 서리집사가 되었지. 회계 장부를 쓰고, 헌금을 관리하고, 뭐든지 배우면서 했던 기억이 나. 그 당시에는 당회장도 없었고, 큰 교회에서 행사할 때마다 목사님과 장로님이 내려와서 도와주시곤 했어. 그런 상황에서 나 같은 총각이 집사가 된 거지. 뭐 시기하는 사람도 없진 않았지만, 나는 그저 맡은 일을 열심히 하려 했을 뿐이야. 가끔 누가 "돈 제대로 쓰고 있냐"고 물어오면, 있는 그대로 헌금 내역을 보여줬지. 그럼 더 이상 뭐라고는 안 했어. 정직하게 하는 걸 하나님이 기뻐하시니까. 그렇게 청년 시절부터 교회와 함께 자라다 보니, 나중에 교회가 성장하고 장로를 세워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왔어. 그때 내 나이가 서른넷이었지. 이제 막 교회가 본격적으로 조직을 갖추고 갈라질 뻔한 상황도 있었는데, 다행히 하나가 되어서 나와 김명조 장로님 둘이 당회를 구성하게 되었어. 그게 내 장로의 시작이었지. 그 이후로는 뭐 교회 일이라면 뭐든지 발 벗고 나섰어. 교회학교, 중고등부 교사, 남성교회, 시찰회, 연합회... 부지런히 다녔어. 나는 장로라는 직분이 그냥 이름만 걸어놓는 자리가 아니라 생각했거든. 부지런히 움직이고, 어디든 필요하면 가는 사람이 진짜 장로지. 그렇게 나는 교회와 함께 커갔고, 지금 돌아보면 그 시간이 참 귀하고 감사하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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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의 교회 건축 – 흙과 눈물로 세운 하나님의 집

교회를 짓는다는 건 그저 건물을 올리는 게 아니더군. 난 평생 세 번, 교회를 직접 지었어. 처음엔 진짜 손으로 흙을 파고 보루를 만들어 지었지. 바닷가에서 흙 퍼다가 씻고 말리고, 직접 돌 들고 다니고, 트라스라는 것도 배운 데 없이 눈으로 보고 따라 만들었어.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위험한 작업이었는데도, 그땐 그저 교회를 짓는다는 마음 하나로 움직였던 것 같아. 먹을 것도 변변치 않아서 보리쌀 두 번 삶고, 큰 빨간 콩 넣어 한 끼 때우고 그랬어. 전기 전주도 다 나무였는데, 산에서 전주 바뀌고 남은 나무 하나 얻어다가 톱으로 켜서 트라스로 쓰고. 무슨 자재가 있다고 제대로 했겠어? 폐 철사 주워다가 철근 대신 돌려 쓰고, 그렇게 하나하나 쌓아 올린 거지. 그렇게 세운 교회가 허술해지면 다시 짓자고 또 일어났고, 마지막 교회는 최완호 목사님이 자기 생활비 1년치인 천만 원을 헌금하면서 시작됐지. 그 마음에 나도 감동돼서 나도 천만 원 냈어. 그 시절 천만 원이면 지금으로 치면 몇 억짜리야. 나중엔 헌당식 날 400명 넘는 사람들이 모이고, 빚 한 푼 없이 교회 짓고 남은 돈도 있었어. 교회는 그렇게 짓는 거더라고. 돈보다 마음, 기술보다 기도, 그리고 혼자가 아니라 함께. 지금도 그 교회 바라보면, 피 땀 흘렸던 그때의 내 손이, 내 기도가, 그 자리에 있다는 게 감사할 뿐이야.


기록의 은혜 – 일기로 남긴 공동체의 역사

나는 교회를 지을 때 그냥 지나치지 않았어. 그날그날 누가 왔고, 무슨 일을 했고, 어떤 기도를 했는지 하나하나 적어놨지. 처음엔 별 생각 없이 쓰던 게, 나중엔 책처럼 묶이게 됐고, 우리 집사람이 다 정리해서 만든 일지책이 되었어. 그 책은 단순한 기록이 아니야. 우리 교회가 어떻게 세워졌는지, 누가 함께했는지, 눈물과 기쁨이 얼마나 흘렀는지를 그대로 담은 역사 그 자체라네. 나중에 어떤 목사님이 그 일기장을 보고 눈물 흘리더라고. 자기는 그런 교회를 만나 본 적 없다고 말이지. 하나님은 사람의 기억보다 기록을 더 귀하게 쓰시는 분 같아. 때론 말보다 글이 더 오래 남잖아. 나도 그 일기를 들여다볼 때마다, 이 일이 내 힘이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하신 일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그래서 나는 지금도 말하고 싶어. ‘기록은 은혜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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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기선교, 교회건축, 그리고 열방을 향한 마음


내가 교회를 짓는 일이 한국에서만 끝나지 않을 줄은 몰랐지. 은퇴하고 나서야 더 본격적으로 선교를 나가게 됐는데, 처음 간 곳이 캄보디아였어. 맨발로 다니고, 지붕 하나 없는 집에 사는 사람들을 보면서 나는 울었어. 그냥 눈물이 나더라고. 우리나라에서는 상상도 못할 환경이니까. 그때부터였어. 내가 가진 기술, 경험, 마음을 하나님 나라에 쓰기로 결심한 게. 태국의 산골 마을, 카렌족 기독학교에 예배당을 지어주고, 네팔에도 지었지. 지금은 인도네시아의 느헤미야 교회를 짓고 있어. 목회자 없이 예배 못 드리는 곳에, 예배당 하나 세워주는 게 그들의 전부가 되더라고. 돈이 많아서 한 게 아니야. 커피 한 잔 값 아껴서, 외손자까지 함께 가서, 그냥 기쁨으로 한 거야. 하나님이 내게 기술 주시고 건강 주셨으니, 그거 써야지. 그게 내가 받은 은혜에 보답하는 길이라 생각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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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과 함께 드리는 선교 – 세대를 잇는 복음의 발자취

나는 혼자 선교 간 적이 별로 없네. 늘 누군가는 같이 갔어. 아들, 며느리, 딸, 손자까지 다 같이 선교를 다녔지. 내 삶의 가장 큰 복 중 하나는 바로 이거야. 믿음의 유산이 대를 이어 함께 이어진다는 거. 태국 헌당식 갈 땐 처남댁에 외손자까지 데리고 갔고, 손자가 사진 찍고, 딸은 통역하고, 며느리는 준비물 챙기고… 모두가 자기 역할을 감당했어. 그 모습 보면 내가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 하나님께서 내게 허락하신 선교는 단순한 봉사가 아니라, 가족을 통해 흘러가는 믿음의 물줄기야. 자녀들이 “아버지 그만 하세요” 해도 나는 말하지. “하나님이 건강 주시는 날까지는 내가 할 수 있는 걸 해야지.” 그게 내 방식이고, 우리 집안의 자랑이야. 믿음으로 함께 사는 삶, 그것만큼 아름다운 게 어디 있겠나.


삶의 마지막까지 교회를 짓는 이유

요즘 몸이 좀 불편하긴 하지. 암 수술도 받고, 방사선 치료도 두 번이나 했거든. 그런데도 나는 이 몸으로 계속 교회를 짓고 있어. 왜냐고? 하나님이 건강을 주셨으니,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멈추면 안 되잖아. 나는 그렇게 배웠고, 그렇게 살아왔지. 사람들은 말해. “이제 그만 좀 쉬세요.” 우리 애들도 그래. 근데 난 그렇게 생각 안 해. 하나님이 주신 건강과 물질은 썩히지 말고, 쓰라고 주신 거라 믿거든. 인도네시아든 네팔이든, 교회가 필요한 곳이 있다면 난 가서 짓고 싶어. 헌당식 날, 그 사람들 얼굴에 번지는 웃음과 눈물을 보면, 그게 바로 하나님이 원하신 일이었구나 싶어서 더 힘이 나. 나는 돈이 많아서 이 일을 하는 게 아냐. 적은 돈이라도 하나님의 일에 쓰이면 그게 가장 가치 있는 일이거든. 그러니, 내가 죽는 날까지, 아니 숨이 붙어 있는 한, 나는 계속 교회를 지을 거야. 그게 내 소명이니까. 하나님이 주신 마지막 사명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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