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기도는 멈추지 않았다”
“어머니는 돌아가시기 전까지도 내게 ‘교회 좀 나가라’고 하셨어요. 나는 ‘알았어요’ 하고, 한 귀로 듣고 흘렸죠.” 남정우 장로에게 ‘신앙의 뿌리’를 물으면, 어머니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평생 교회를 떠나지 않고 자녀들을 품에 안고 예배하던 분, 믿음으로 자녀를 키우며 아들의 영혼을 위해 눈물로 기도하던 분. “어머니는 102세에 돌아가셨어요. 그 긴 생애 동안 내 신앙을 위해 기도하신 거예요.” 서울 상경 이후, 신앙은 점점 멀어졌다. 취업도, 결혼도, 사업도, 현실이란 이름으로 하나씩 밀려들었다. “등산 모임, 거래처 약속, 회사 일… 교회보다 바쁜 일이 많았죠. 그렇게 신앙은 습관에서 ‘선택사항’으로 바뀌었습니다.” 그 40년은 장로님의 표현대로 ‘광야’였다. 믿음이 말라가고, 영혼이 무뎌지는 시간이었지만, 어머니는 끝내 포기하지 않았다. “그때는 몰랐습니다. 그런데 돌이켜 보니, 어머니가 기도하셨기에 내가 돌아올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결국 그는 다시 교회로 돌아왔고, 오히려 누구보다 더 열정적인 새벽 기도의 사람이 되었다. “40년을 멀어졌으니, 이제 남은 40년은 하나님께 드리고 싶어요. 그게 어머니의 기도에 대한 답이라고 믿습니다.”
“그날, 차는 뒤집어졌지만 나는 일어났다”
“차는 완전히 뒤집혔는데, 나는 기스 하나 없이 나왔어요.” 남정우 장로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날의 충격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2009년, 새벽기도를 마친 그는 ‘예배는 드렸으니 현장도 둘러보자’며 출근길에 올랐다. 평소 다니던 교회의 주일 예배는 잠시 미루고, 일을 향한 발걸음을 택한 그 순간—차량은 고속도로에서 전복됐다. “누가 박은 것도 아니고, 브레이크가 말을 안 듣더니 차가 그대로 뒤집혔어요.” 하지만 놀랍게도, 그는 스스로 걸어 나올 수 있었다. 뒤에서 덮친 차량도 없었고, 몸은 멀쩡했다. “그날 깨달았죠. 하나님이 내게 경고하신 거구나. ‘너, 죽을 수도 있었다’고… 그리고 ‘내가 살렸다’고.” 그날 이후, 그는 달라졌다. “교회를 청소하는 게 무서워서가 아니라, 그분의 은혜에 감격해서 시작했어요.” 장로는 그 경험을 교회에서 간증했고, 그 순간부터 예배는 절대 양보할 수 없는 삶의 중심이 되었다. 그는 말한다. “그 전복사고가 없었다면, 난 아직도 ‘교회는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일’이라 생각하며 살았을 겁니다.” 차가 뒤집힌 날, 그의 인생은 하나님 앞에서 다시 ‘뒤집혔다.’ 이제는 말한다. “그날은 내 인생의 두 번째 생일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교회에 ‘묶어두셨다’”
“이상하게 일이 생기면 꼭 교회에서 1시간 거리 안에서만 생기더라고요.” 남정우 장로는 40년 동안 건축업을 해 왔다. 서울, 평택, 아산… 전국을 오가며 일한 세월 동안 그는 분명 알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일부러 그의 삶을 교회 중심으로 ‘묶어두셨다’는 것을. “현장을 따지면 멀리서도 부르면 가야 하잖아요. 근데 이상하게도 현장이 다 교회랑 가까운 데 생겼어요. 이제는 알겠어요. 하나님이 날 붙들어 두신 거예요.” 2009년부터 시작한 차량 운행 봉사는 그렇게 시작됐다. 매일 새벽, 잠을 줄이고 운전대를 잡았다. 교회에 나오기 어려운 80대, 90대 어르신들을 집 앞까지 모시러 가는 일은 단순한 봉사가 아니었다. “그분들은 교회에 오고 싶어도 못 와요. 자녀들이 못 모시면 내가 모셔야죠. 나는 ‘하나님 앞에 성도들을 데려다 드리는’ 운행 기사입니다.” 운행 중에는 오해와 불평도 있었다. “왜 집 앞까지 안 오냐, 왜 기다리게 하냐… 별 얘기 다 들었죠.” 하지만 그는 시험에 들지 않았다. “억지로 한 적 없습니다. 그저 주님 앞에 드리는 일이라 생각했어요.” 그는 15년째, 여전히 그 운전대를 놓지 않고 있다. “40년 떠났던 세월에 대한 회개로, 남은 생을 드리고 싶습니다. 교회 중심의 삶, 예배 중심의 인생. 그게 이제 제 두 번째 인생입니다.”
“장로가 된다는 건, 일꾼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중간에 관두는 법이 없습니다. 손해를 봐도, 끝까지 합니다.” 남정우 장로는 직업으로도 건축인이지만, 신앙 안에서도 그는 ‘현장 사람’이었다. 한 교회 건축 공사에 참여하게 되면서 시작된 인연은, 그를 다시 교회 중심의 삶으로 이끌었다. “귀 파고 들어갔더니 말과 달리 문제가 많더라고요. 하지만 공사를 맡았으면 끝까지 가야죠.” 그가 건축했던 교회는 단순한 현장이 아니었다. 재정도 부족했고, 구조도 복잡했으며, 공사 중간에 물러나고 싶은 순간도 있었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힘들어도, 손해를 봐도… 우리는 성전을 짓는 거잖아요. 내 이름이 아닌, 주님의 이름을 위해 짓는 일이니까요.” 그는 동료와 함께 돈도 투입하며 공사를 이어갔고, 어느새 현장이 삶이 되었고 교회가 쉼이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이 교회를 짓는 동안, 나는 하나님과 얼마나 가까워졌는가?’ 그는 교회 근처로 이사했고, 교회 중심의 삶을 시작했다. “교회를 중심으로 이사 오는 게 제 방식입니다. 내 삶의 무게중심을 교회로 옮기는 것—그게 제 신앙의 표현이죠.” 건축으로 시작된 인연은 운행 봉사로, 새벽기도로 이어졌고, 결국 ‘장로’라는 이름으로 열매 맺었다. “장로가 된다는 건 명예가 아니라, 일꾼이 되는 겁니다. 현장을 지키는 사람, 공동체를 살리는 사람—그게 제가 감당해야 할 몫이라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나의 지팡이입니다”
“예전엔 돈이 있어야 마음이 편했어요. 지금은 10원이 없어도 자유롭습니다.” 남정우 장로는 자신을 “욕심 많던 사람”이라 고백한다. 더 벌고, 더 이루고, 더 앞서 나가고 싶었던 삶. 하지만 그 마음이 바뀌기 시작한 건, 예수님을 삶의 중심에 모신 이후부터였다. “배려하는 마음이 생기고, 비워내는 법을 배우게 되더라고요.” 그는 교회를 통해, 신앙을 통해, 그리고 새벽마다 드리는 기도를 통해 ‘비움의 은혜’를 배워갔다. “사업도 잘 됐지만, 기복이 있었어요. 올라갔다가 내려가고, 또 엎어졌다가 다시 세워지고… 그 안에서 나는 결국 하나님 손 안에 있었다는 걸 알게 되었죠.” 그러던 중, 1년 반 전 위암 초기 진단을 받았다. “다행히도 조기 발견이었고, 수술도 잘 됐습니다. 그 작은 병원에서 ‘서울로 가보라’는 권유를 듣고 가서 진단을 받았는데, 정확하게 맞았죠.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선 설명이 안 됩니다.” 그는 이제 인생의 후반기를 ‘전성기’라 말한다. “아픈 여생이 아니라, 쓰임 받는 여생으로 살고 싶어요. 하나님이 내게 주신 건강, 나의 시간, 내 재능—모두 교회를 위해 사용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는 고백한다. “예수님은 내 인생의 지표입니다. 내 삶의 중심이고, 나의 지팡이입니다. 그분이 계시기에 오늘도 나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나는 아직, 봉사의 길 위에 있다”
“40년을 멀리 있었으니, 남은 40년은 하나님께 드려야죠.” 남정우 장로는 자신의 인생을 수치로 나누어 설명했다. 20년의 어린 시절, 40년의 광야 같은 방황, 그리고 이제 시작된 40년의 봉사. 그는 그렇게 남은 여생을 ‘신앙의 회복과 헌신’으로 채우기로 결심했다. “지금 제 나이는 70이 넘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제부터가 전성기라고 믿습니다.” 매일 새벽, 누구보다 먼저 일어나 운전대를 잡고, 교회 현장 곳곳을 살피는 일은 그의 일상이 되었다. 힘든 날도 있고, 피곤한 날도 있지만 억지로 한 적은 없다. “내가 안 모시면, 그분들은 예배에 못 오세요. 나는 하나님 앞에 성도들을 모시는 사람입니다. 그게 제 사명이에요.” 그는 자녀들에게도 축복을 전했다. “믿음 안에서 살고, 하나님을 마음에 두고 살아라. 천국 가는 길이 반드시 열릴 거다.” 그는 이미 자신이 물려줄 수 있는 가장 큰 유산이 ‘믿음’임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날을 위해 남긴 영상— 자신의 장례식에 틀어질 인사 영상에서 그는 말했다. “내가 혹시 잘못한 게 있다면 용서해 주세요. 예수님 믿고, 우리 나중에 하늘나라에서 다시 만납시다.” 이 글을 읽는 누군가에게 남정우 장로의 삶이, 다시 신앙으로 돌아갈 용기를 줄 수 있기를. 그리고 그의 바람처럼, 인생의 끝이 아니라 여전히 ‘봉사의 길 위에 있는’ 그의 오늘이, 하나님의 기쁨이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