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 아니면, 여기까지 올 수 없었습니다

  • 문순선 권사님
    1955년 01월 01일에 핀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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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려졌지만, 살아야 했기에

자신의 이름을 또박또박 말하는 권사님의 첫마디에는 묘한 단단함이 담겨 있었다. 1955년 서울 문래동에서 태어난 그녀의 삶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난과 생존의 연속이었다. 어릴 적 계모의 학대로 인해 다리를 다쳤고, 그로 인해 평생을 장애를 안고 살아야 했다. 결국 경찰의 손에 이끌려 부평 성모 고아원에 맡겨지던 날, 그녀는 어린 나이에 부모의 존재를 마음에서 지워야 했다. 그곳에서 수녀님들의 손길 아래 수술을 받고 겨우 걸음을 뗐지만, 몸보다 더 아픈 것은 버려졌다는 기억이었다. “살라니까, 살라고 하시니까, 살아야 했어요.”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누구도 그녀에게 살아야 한다고 강요하지 않았지만, 하나님은 그 생명을 포기하지 않으셨다. 누군가의 보호 없이 혼자 살아남기 위해, 그저 생존하기 위해 그녀는 무엇이든 해야 했다. 처음으로 삶을 이어가기 위한 선택은 “일”이었다. 몸이 불편한 그녀에게 안정적인 직장은 허락되지 않았기에, 그녀는 노점부터 노가다까지, 안 해본 일이 없다고 말했다. “포장마차도 했고, 나무장사도 했고, 그냥 닥치는 대로 했어요. 애들 굶길 수는 없잖아요.” 그녀는 엄마였기 때문이다. 문순선 권사님의 이야기는 화려하지 않다. 하지만 깊이 들여다보면 그 삶은 감히 누구도 쉽게 흉내 낼 수 없는 견고한 믿음의 여정이기도 하다. 신앙은 단 한 번에 시작되지 않았다. 어린 시절 천주교 고아원에서 흘러나온 찬송가와 기도 소리, 그리고 수십 년 후 홍성의 어느 전파상 사모님이 건넨 전도의 손길. 그 모든 만남은 권사님의 마음속 어딘가에 조용히 뿌리를 내렸다. 삶은 무너졌지만, 믿음은 서서히 다시 자라나기 시작했다. 문순선 권사님의 이야기는 그 누구의 것보다도 진솔하고, 그래서 더 따뜻하다. 버려졌지만 살아야 했고, 맨몸으로도 기어이 집을 짓고, 다시 하나님 앞에 서기까지—그녀의 인생은 ‘은혜’라는 단어로밖에 설명할 수 없다. 이제 그 여정을 따라가 보려 한다.

"네 아이를 위해 버틸 수밖에 없었던 시간"

“첫 남편이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어요. 아이들이 너무 어렸어요. 네 마리, 네 아이를 데리고... 안 해본 게 없죠.” 문순선 권사님의 이 한마디에는 그 어떤 설명보다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한 명도 아닌 네 명의 자녀를 품고 남편 없이 살아가야 했던 시간은 상상 이상으로 혹독했다. 삶이 무너지기 시작할 때, 그녀는 주저앉을 틈도 없이 다시 일어섰다. 엄마였기 때문이다. “포장마차도 하고, 노가다도 하고, 나무장사도 했어요. 트럭에 나무 싣고 다니며 당진, 장막 같은 데 가서 팔았죠.” 그녀는 남편을 잃고 생계의 무게를 혼자 감당해야 했다. 그저 굶기지 않겠다는 마음 하나로 새벽을 여는 장사, 허리도 제대로 펴지 못한 채 쌀을 나르고 나무를 팔았다. 몸은 이미 상처투성이였다. 어린 시절 당한 계모의 학대는 골수염을 남겼고, 다리는 여전히 불편했다. 하지만 그녀는 주저앉을 수 없었다. “면접에서 떨어졌어요. 다리가 이러니까… 그러니까 내가 할 수 있는 건 장사뿐이었죠.” ‘누가 나를 붙잡아 줄까?’라는 질문은 사치였다. 누군가 도와주길 바라기엔 삶이 너무 급했고, 아이들이 너무 어렸다. 초등학교 1, 2, 3학년을 막 다니던 아이들은 아빠의 빈자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모른 채 엄마의 손만 붙잡았다. 권사님은 그 작은 손들이 놓치지 않도록, 단 하루도 흐트러지지 않으려 애썼다. “그냥 살아야 했어요. 애들이 있으니까. 울 시간도 없었어요.” 그녀는 자신을 ‘엄마’라고 부르는 책임 하나로 버텼다. 자신이 힘들다고 투정하지 않았다. 대신 아이들에게는 언제나 따뜻한 밥을 차리고, 친구들 앞에서 기죽지 않게 해주고 싶었다. 그건 세상 그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는 ‘엄마의 자리’였다. 그녀의 삶을 보면, ‘믿음’은 그저 종교의 언어가 아니다. 믿음은 생존의 언어였고, 자식을 위한 결단이었다. 문순선 권사님은 그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아내셨다. 이유는 단 하나, “엄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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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넷에 얻은 기적, 막내 하늘이”

“마흔넷에 아이를 낳았어요. 같은 장애인 남자와 만나서… 그 아이가 지금 스물일곱이에요.” 이미 네 아이를 키우고, 남편과는 사별하고, 몸도 마음도 지쳐 있던 그녀의 인생에 또 한 번 ‘기적’이 찾아왔다. 문순선 권사님은 이 새로운 생명을 선물처럼 말했다. “하늘이”라는 이름을 가진 막내딸은 그녀에게 남은 생을 다시 일으킬 힘이었다. 장애가 있는 이성과의 만남은 쉽지 않았다. 그 또한 목발을 짚고 다녔고, 문신이 가득한 사람이었다. 세상 사람들이 말리는 만남이었지만, 그녀는 그저 “거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회상했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선택할 여유조차 없던 삶이었기에, 그 감정은 더 이상 연애나 낭만의 언어가 아니었다. 그저 함께 살아내야 할 존재를 받아들이는 결정이었다. 하늘이는 그렇게 태어났다. 이미 네 아이를 키워 본 그녀였지만, 마흔을 넘겨 얻은 이 아이는 유난히 눈물겹게 귀했다. “그때 애가 세 살이었어요. 해비타트 집 짓기 신청하고, 그 애 때문에 당첨된 것 같아요.” 그 집을 짓기 위해, 그녀는 자신의 모든 체력을 쏟아부었다. 오전에는 장사, 오후에는 벽돌을 나르고, 땅을 다졌다. 자신이 살 집이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하늘이와 함께 살 공간이 생긴다는 사실 하나가 그 노동을 견디게 해주었다. 그렇게 태어난 하늘이도 어느덧 자라, 어엿한 성인이 되었다. “요즘은 얼굴 본 지 몇 달 됐어요. 그래도 보고 싶어요. 또 한 번 여행 가고 싶고.” 권사님의 눈에는 여전히 그 아이가 어릴 적 그 모습 그대로였다. 엄마에게 막내는 언제나 막내였고, 다시는 오지 않을 봄날 같았다. “막내가 있어서 내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어요.” 지치고 무너져도,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게 했던 이름. 문순선 권사님의 삶에 있어 하늘이는, 그 자체로 하나님의 선물이었다. 기적은 멀리 있지 않았다. 엄마의 품에 안긴 작은 생명 하나가 바로 기적이었다.


“방황 속의 부르심, 다시 교회로”

“홍성에서 방황도 많이 했죠. 포장마차 하고, 술도 마시고, 마음이 참 힘들었어요.” 문순선 권사님의 입에서 나온 ‘방황’이라는 단어는 단순한 표정이 아니었다. 홀로 아이들을 키우며 먹고살기 위해 애쓰는 사이, 그녀의 마음은 어느 순간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삶이 전쟁처럼 치열했던 만큼, 믿음의 자리도 멀게만 느껴졌다. 하지만 하나님은 잊지 않으셨다. 그녀를 향한 부르심은 여전히 유효했고, 그 부르심은 뜻밖의 사람을 통해 다가왔다. “홍성에 있던 전파상 사모님이 자꾸 저를 전도했어요.” 수많은 지나가는 인연들 가운데, 한 사람의 손길이 문 권사님의 마음을 두드렸다. “매일 먹을 것도 갖다 주고, 챙겨주시고... 그게 너무 감사했어요.” 처음엔 부담스러웠던 관심이, 나중에는 위로가 되었고, 결국 그녀는 장로교회 예배당에 조심스레 발을 들였다. 그것이 90년대 중반의 일이다. 어린 시절 천주교 고아원에서 자라며 익숙했던 종교의 언어는, 어른이 되어서는 다시 그녀를 따뜻하게 감싸주었다. 하지만 그 믿음은 단숨에 깊어지지 않았다. “나이롱 신자였죠. 그냥 갔다 안 갔다... 신앙에 빠진 건 아니었어요.” 누군가는 그 모습을 연약하다고 말할지 몰라도, 문 권사님에게 그 신앙은 생존의 일부였다. 믿음이라는 단어보다 ‘하나님이 계시다’는 존재의 감각이 그녀의 내면에 조용히 뿌리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뿌리는 시간이 흘러 결국 그녀를 깊은 믿음의 자리로 이끌었다. “처음에는 몰랐죠. 그게 하나님의 부르심이었다는 걸.” 문 권사님의 말처럼, 하나님은 때로 그렇게 조용히 사람을 부르신다. 삶이 흔들릴 때마다 한 걸음 더 가까이, 그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도록 돕는 이들을 통해, 하나님은 그녀를 다시 교회로, 다시 믿음으로 인도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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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집은 내가 짓는다 – 해비타트 이야기”

“진짜, 구석구석 제가 다 지었어요. 집에 애착이 많아요.” 문순선 권사님은 집 이야기를 할 때 유난히 눈빛이 반짝였다. 그것은 단순한 주거공간이 아니라, 인생의 터전이었고 하나님이 허락하신 은혜의 결과였다. 그녀에게 집은 거저 주어진 것이 아니었다. ‘해비타트’라는 희망의 프로젝트를 통해 자신의 손으로 하나하나 만들어낸 축복의 현장이었다. 2000년, 그녀는 충남 지역에 새롭게 조성되는 해비타트 마을에 신청서를 넣었다. “구구절절 편지를 써서 보냈죠. 막내 하늘이 때문에 된 것도 같아요.” 당시 하늘이는 세 살. 어린아이를 둔 가정이 우선순위였던 그 프로젝트에서 그녀는 자격이 있었고, 무엇보다 절박했다. 당첨이 되고 나서부터 그녀는 이 집을 ‘하나님의 선물’로 여겼다. 하지만 그 선물은 노동 없이 주어지지 않았다. “오전에는 장사하고, 오후엔 가서 무조건 일했어요. 한나절은 꼭 일해야 했으니까요.” 몸이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누구보다 성실하게 현장에 나갔다. 벽돌을 나르고, 페인트칠을 하고, 나무를 자르고. 여느 남자들 못지않은 근성과 책임감으로 그녀는 집을 지었다. 땀이 옷을 적시는 날도 있었고, 몸이 비명을 지르는 날도 있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내 집이잖아요. 그 꿈에 부풀어서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 몰라요.” 그렇게 완성된 집은 단순한 건물이 아니었다. 방 하나, 부엌 하나, 마당 하나에 그녀의 눈물과 기도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지금도 집에 들어올 때마다 감사해요. 여기 아니었으면, 지금 내가 어디 있었을지 몰라요.” 누군가에겐 평범한 공간일지 몰라도, 문 권사님에겐 ‘하나님이 허락하신 약속의 땅’이었다. 그 집에서 시작된 새로운 삶은 그녀에게 다시 신앙의 불을 지폈고, 이웃과 공동체, 교회를 다시 품게 해주었다. 벽돌 위에 지어진 집이 아니라, 믿음 위에 세워진 인생. 그녀의 ‘집’에는 하나님의 손길이 선명히 새겨져 있었다.


“장 목사님과의 인연 – 나무를 베며 시작된 교회”

“그냥… 나무를 베었어요. 여기에 교회를 세울 거라는 말도 없었는데, 그냥 그랬어요.” 한마음교회의 시작은 아주 특별했다. 건축 허가도, 큰 기획도 없이, 권사님의 손에서 나무 하나를 베는 일로 시작되었다. 그 땅 한가운데에서, 문순선 권사님은 믿음으로 움직였고, 교회의 첫 삽은 그녀의 손끝에서 시작되었다. 장 목사님과의 인연은 이미 깊었다. 처음에는 단순히 전도받은 교인으로 시작했지만, 목사님은 그녀를 끊임없이 챙겼다. 다른 교회로 옮길 때도, 설 자리를 찾지 못하고 낙심할 때도, 늘 그녀를 붙들어주었다. “내 손을 잡아줬어요. 그때 목사님은 그냥 가족 같았어요.” 신앙의 길잡이이자, 삶의 친구 같았던 목사님은 어느 날 개척을 결심했다. 특별한 전략도, 재정도 없었지만, 함께하겠다는 마음만큼은 확실했다. 그러던 어느 날, 권사님은 아무도 말하지 않은 일을 행동으로 옮겼다. “목사님이 어디 간 사이에, 내가 먼저 와서 나무를 베었어요.” 그 넓은 터에 예배당을 세우겠다는 간절함, 그리고 ‘이제는 여기서 다시 시작하자’는 믿음 하나로. 그녀의 행동은 단순한 삽질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이었다. 그렇게 해서 한마음교회가 세워졌다. 컨테이너 예배당에서 시작했지만, 그곳엔 눈물의 기도가 있었고, 말씀의 은혜가 있었다. 권사님은 말한다. “나는 교회를 세우겠다는 말도 안 했어요. 그냥… 그렇게 되었어요.” 그 말에는 설명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사람의 계획을 뛰어넘는 섭리가 담겨 있었다. 누군가는 교회를 건축도면과 헌금으로 세운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문순선 권사님과 장 목사님에게, 교회는 ‘삶으로 세운 자리’였다. 나무를 베는 손길 하나, 예배를 사모하는 가슴 하나가 모여 지금의 한마음교회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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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삶, 욥과 같았지만”

“욕이 생각나요. 피부병 나고, 친구들도 떠나고… 그래도 하나님 안 버렸잖아요.” 문순선 권사님은 조용히 그렇게 말했다. 가장 마음에 남는 성경 이야기를 묻자, 그녀는 주저 없이 ‘욥’을 떠올렸다. 가난하고, 아프고, 버림받고, 배신당해도 여전히 하나님을 부인하지 않았던 사람. 자신의 인생이 꼭 욥과 닮았다는 것이었다. “내 삶 자체가 그랬어요. 누가 힘들게 해서가 아니라 그냥… 내 삶이 힘들었어요.” 태어날 때부터 평탄하지 않았던 인생. 어린 시절 계모의 학대로 입은 다리 상처는 평생 그녀의 걸음을 불편하게 만들었고, 아이들을 낳은 후에도 남편을 폐암으로 떠나보낸 뒤, 네 명의 아이를 혼자 키워야 했다. 하루하루가 전쟁이었다. “면접 보러 가도 떨어졌어요. 다리 때문이죠. 그러니까 할 수 있는 건 장사뿐이었어요.” 그렇게 그녀는 포장마차를 하고, 나무를 팔고, 오토바이를 타고 바닷물까지 퍼 나르며 살았다. “진짜 안 해본 게 없어요. 애들이 있으니까, 무조건 살아야 했어요.” 그녀는 몸이 지쳐도, 마음이 무너져도 결코 멈출 수 없었다. 신앙조차 사치로 느껴지던 시절, 그녀는 간절하게 살아내야 했다. 하지만 그 모든 시간 속에서도, 하나님은 결코 그녀를 놓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늘 돌아오게 하시더라고요. 술 마시고 쓰러지고 방황할 때도, 항상 다시 붙들어 주셨어요.” 그녀가 욥을 떠올리는 이유는 단순한 고난 때문이 아니다. 욥이 끝내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고, 끝내 회복되었기 때문이다. “나도 그랬어요. 힘들 때마다 욕도 이랬지, 하면서 스스로 위로했어요.” 그래서일까, 자녀들에게는 늘 감사하다. 아버지 없이 자란 아이들이지만, 누구 하나 탈선하지 않고, 제 몫을 해내며 살고 있다. “내가 무슨 재산을 물려준 것도 아닌데, 다들 잘 커줬어요. 그것만으로도 너무 감사해요.” 문순선 권사님의 고백은 한마디로 이뤄진다. “하나님이 계셔서… 내가 견딜 수 있었어요.”


“장애와 차별 속에서도, 나는 여전히 일한다”

“지금도 새벽 5시에 일어나요. 아직 직장 다녀요. 일할 수 있다는 게, 그게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올해로 70세. 장애가 있고, 평생을 힘겹게 살아온 문순선 권사님은 오늘도 출근을 한다. 세상은 그 나이에 쉬어야 한다고 말하지만, 권사님은 여전히 누군가의 식사를 준비하고, 오후엔 일찍 돌아와 집안일을 돕는다. 단순한 노동이 아니다. 그 일은 그녀에게 ‘존재의 증명’이고, ‘하나님이 허락하신 삶의 자리’다. “다리가 불편하니까 일할 기회도 많지 않아요. 그래서 면접 볼 때마다 떨렸죠. 그래도 지금 회사에서 받아줬어요. CJ랑 계약된 급식소예요. 한 300명 식사 준비해요.” 그녀는 수급자로 살던 시절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다만, 늘 기도했다. “하나님, 저도 십일조 하고 싶어요. 돈 벌게 해 주세요.” 그 기도는 현실이 되었고, 이제는 떳떳하게 십일조를 드릴 수 있는 삶이 되었다. 매달 꾸준히, 작은 월급에서 정성껏 구별해 드리는 그 손길은 누구보다 믿음이 깊다. “다들 나이 많다고 안 시켜요. 서류 보고 탈락하죠. 근데 하나님은 나를 보셨어요.” 자신을 채용해준 회사가 감사하고, 그 일을 통해 또 다른 자립의 길이 열린 것이 감사하다. 혼자가 아닌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의 한 일원으로 일한다는 것. 그것은 권사님에게 삶의 기쁨이자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가장 큰 헌신이다. “장애가 있어도요, 나이 많아도요, 하나님이 길을 내주세요. 그래서 저는 멈출 수 없어요.” 문순선 권사님의 일상은 누구보다 고단하지만, 그 안에는 절망이 없다. 오히려 일할 수 있음에 감사하고, 믿음으로 버틴 시간들이 더 큰 용기를 주었다. 몸은 불편해도, 마음은 단단히 서 있는 그녀. 그 삶의 중심에는 늘 ‘하나님을 향한 감사’가 흐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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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다면”

문순선 권사님의 삶을 따라 걸으며 우리는 한 가지 질문을 마주하게 됩니다. ‘이토록 험하고 깨어진 삶을, 어떻게 포기하지 않고 살아낼 수 있었을까?’ 그 답은 아주 분명했습니다. 권사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다면, 저는 여기까지 못 왔어요.” 버려졌던 어린 시절, 장애로 인한 차별, 남편과의 사별, 혼자 네 아이를 키워야 했던 고단한 세월, 포장마차와 노가다로 이어진 생계의 자리들… 그 어떤 장면도 쉬웠던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그 모든 시간 속에서 ‘하나님은 결국 나를 붙잡아 주셨다’고 고백합니다. 집 없는 사람에게 집을 주셨고, 일할 수 없는 사람에게 일할 자리를 주셨으며, 믿음을 잃은 영혼에게 다시 교회와 공동체를 허락해주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그녀의 손으로 교회 터의 나무를 베게 하심으로써 한 교회의 시작을 함께하게 하셨습니다. 그 삶의 마지막 마디마다, 하나님의 손길이 숨 쉬고 있었습니다. 이번 인터뷰를 함께했던 인생화원 사역팀에게도 문순선 권사님의 이야기를 듣는 시간은 단순한 기록을 넘어, 진정한 믿음과 삶의 본질을 다시 마주하는 뜻깊은 순간이었습니다. 어둠 속에서도 감사와 순종을 놓지 않았던 한 신앙인의 고백은, 우리 모두의 마음을 다시 주님 앞에 세우게 했습니다. 문순선 권사님의 이야기는 특별한 사람이 전하는 위대한 간증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 곁에 있을 법한, 평범하고 조용한 성도의 삶입니다. 그러나 그 평범한 하루하루가 얼마나 깊은 믿음과 은혜 위에 세워졌는지를 우리는 알게 됩니다. 이제 문 권사님의 이야기는 단지 개인의 회고를 넘어, 이 땅의 많은 이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절대 우리를 놓지 않으십니다. 다시 시작할 수 있도록 붙들어 주십니다.” 그 믿음의 증언 앞에, 우리 또한 다시 용기를 냅니다. 우리의 오늘도 하나님의 은혜로 충분하다는 것을 믿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