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선집사님

업로드중입니다

김복여권사님

업로드중입니다

역경 속 피어난 믿음의 꽃

장성진 권사는 영양 일월에서 7남매 중 한 명으로 태어났습니다. 스무 살이 되던 해, 부모님의 뜻에 따라 흥구리로 시집을 오게 되었으나, 결혼 후 그녀의 삶은 곤궁의 연속이었습니다. 밥 짓기, 물 긷기, 손이 얼어붙도록 찬물에 빨래하기 등 온갖 집안일을 도맡아 해야 했습니다. 당시 흥구리는 100가구가 넘는 대촌으로, 한 집에 6~7명, 많게는 10명에 달하는 아이들을 키우는 것이 흔한 일이었습니다. 담배, 고추, 벼, 보리, 콩 등 모든 종류의 농사를 인력으로 직접 지으며 자녀 다섯 명(2남 3녀)을 키워야 했기에, 젊은 시절의 가장 큰 어려움은 경제적 궁핍과 고된 노동이었다고 전했습니다. 장을 보기 위해 아기를 업고 보따리를 이고 4km 떨어진 진보까지 걸어 다녀야 할 만큼 고단한 삶을 살았으며, 그녀의 고생 담은 책 10권으로도 부족하다고 말했습니다.

파란만장한 삶 속 굳건한 신앙의 증인

김명순 권사님은 1944년에 태어나 올해 80대 중반의 연세이십니다. 권사님의 젊은 시절은 신앙생활과는 전혀 무관했습니다. 심지어 교회라는 단어조차 알지 못했고, 기도하는 방법도 전혀 몰랐다고 회고하십니다. 당시 권사님 가정에는 불교를 믿는 어른들이 계셨기 때문에, 교회는 절대로 발을 들여서는 안 되는 곳으로 인식하셨다고 합니다. 이러한 불교적 배경 속에서, 권사님은 스스로 미신을 지키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불교 어른들의 영향 아래 교회와는 완전히 단절된 삶을 사셨습니다. 권사님의 초기 삶은 청김면에서 시작되어 금막으로, 결혼 후 방전을 거쳐 현재의 흥구리 동네로 거처를 옮기는 과정을 겪으셨습니다. 먹고 살기 힘들었던 동네의 전반적인 어려움 속에서, 권사님은 이처럼 인생의 절반 이상을 하나님을 전혀 알지 못한 채 신앙 없는 삶을 살아가셨으며, 이는 훗날 찾아올 극적인 신앙 체험의 배경이 됩니다.

고난 속 피어난 감사와 사랑

흥구 교회 정옥자 권사님의 15년에 걸친 신앙 여정이 펼쳐졌습니다. 육체적 고통 속에서도 감사와 사랑으로 신앙생활을 이어가는 권사님의 이야기는 많은 이들에게 깊은 울림을 선사합니다. 정옥자 권사님은 오래전부터 교회에 다니고 싶은 마음을 품고 있었다고 밝혔습니다. 비록 어릴 때부터 정해놓고 교회를 다니지는 못했지만, 때때로 교회에 방문하곤 했으며, 그때마다 좋은 감정을 느꼈다고 회상했습니다. 그녀는 동네에서 흔히 이루어지는 미신적인 행위나 불공을 드리는 일은 일절 하지 않았다고 언급하며, 이는 교회와 무관하게도 지켜왔던 자신만의 가치관을 보여줍니다. 이처럼 권사님에게 교회는 몸이 아프기 전부터 이미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던, 긍정적인 끌림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녀는 교회를 나오지 않았을 때조차도 늘 교회에 대한 호기심과 동경을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76년 흥구교회 역사와 함께한 믿음의 발자취

정종섭 장로님은 1947년에 출생하셨으며, 그가 두살이던 1949년경 어린 시절 심한 경기를 앓았습니다. 위로 두 분의 누님이 있었고 장로님은 아들로는 맏이였는데, 경기가 심하여 부모님이 양육에 큰 어려움을 겪으셨습니다. 병원에 자주 다녔음에도 잘 낫지 않자, 모친은 목욕재계 후 몸을 단장하고 진보에 있는 한 절을 찾아갔습니다. 밤새도록 절하며 공을 들이다 깜빡 잠이 들었는데, 꿈속에서 부처의 목이 부러지며 그 안에서 예상과 달리 ‘상건불’이 나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 실망스러운 경험은 모친으로 하여금 절에 대한 기대를 접고 교회를 찾아보게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 당시 석포 가구교회의 박대규 신학생이 흥구 동리에서 겨울 방학 중 노방 전도와 전도 집회를 열고 있었고, 모친은 이 집회에 참석하여 마음에 깊은 감동을 받고 신앙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장로님의 경기로 인해 어머니가 여러 곳을 전전하다 교회를 통해 문제가 해결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장로님 자신은 경기가 언제 멈췄는지 정확히 모르지만, 서너 살 무렵부터는 경기가 덜해지고 건강을 찾았을 것이라고 회상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