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난기권사님

나는 어려서부터 부족함 없이 살았어요. 친정이 꽤 잘살았거든요. 배고픔이 뭔지도 모르고 자랐어요. 그런데 결혼하고 시집을 오니, 세상이 달랐어요. 땅을 일구는 개간부터 시작해서, 담배농사며 마늘이며 안 해본 일이 없었어요. 아침부터 밤까지 손에 흙을 묻히고 살았죠. ‘시집이란 게 원래 이런 건가’ 싶을 정도로 고됐어요. 특히 담배농사는 고된 일 중의 고된 일이었어요. 담배잎을 심고, 따고, 말리고, 다시 다듬고… 온종일 허리를 굽힌 채 일하느라 허리가 휘었어요. 쉬는 날이란 건 없었어요. 명절에도 시어른들 챙기랴, 일하랴 정신이 없었지요. 친정에서 느꼈던 여유로운 삶과는 너무 달랐어요. 몸도 마음도 지쳐갔지요. 그 시절을 돌이켜보면, 나를 지탱해 준 건 ‘해야 한다’는 책임감이었어요. 어린 시절 잘살았다고 해서 세상 물정 모르는 게 아니라, 오히려 시집살이하며 철이 들었어요. 아무리 힘들어도 ‘내가 무너지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하루하루 버텼어요. 지금도 그 시절을 떠올리면 눈물보다 한숨이 먼저 나와요. 하지만 그 모든 시간이 지나고 나니,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게 없다는 걸 깨달아요. 내가 겪은 고생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고,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을 심어줬어요. 그래서 지금은 말할 수 있어요. “그때는 힘들었지만, 하나님께서 다 아시고 함께 하셨습니다.”

박병원집사님

업로드중입니다.나는 영덕군 지품면 오천2리에서 태어나서, 지금까지 쭉 이 마을을 떠난 적이 없네. 태어난 집도 여기, 지금 살고 있는 집도 여기지. 어릴 적엔 오천1리 쪽에 큰집이 있어서 형제들하고 같이 살다가, 내가 살림을 차리면서 이쪽으로 내려왔지. 그래서 내 삶의 시작도, 끝도 오천이 될 것 같아. 형제는 일곱 남매였는데, 난 그중 셋째였어. 그 시절엔 형제 많은 집이 흔했지. 형님은 참 똑똑했어, 그 시절에 대학교까지 다녔으니까. 근데 나는... 6학년 2학기 때 학업을 멈췄지. 6.25 전쟁이 터지고, 아버지 돌아가시고, 할아버지가 우리를 이끄셨거든. 학교 대신 똥지게를 지고, 소 오줌이고 사람 똥이고 모아서 보리밭에 뿌리고, 그게 우리 밥줄이었으니. 할아버지는 참 신실한 분이었지. 산에 올라가 밤마다 하나님께 빈다고 기도하시던 분. 시장에 가셔도 꼭 과일 하나 사 오셔서 하나님께 드리고, 그 믿음이 내게도 전해졌어. 우리는 가난했지만, 그 안에 뭔가 든든한 게 있었어. 할아버지 덕에 땅도 조금 사고, 삶의 방향도 조금씩 나아갔지. 나는 학교도 못 마쳤고, 배운 것도 없지만, 하나님이 이 오천 땅에서 내게 맡기신 게 있었다고 생각해. 농사짓고, 교회 섬기고, 자식들 키우고, 그것으로 내 인생을 채웠지. 지금 돌이켜보면, 참 평범하고도 고마운 삶이었다네. 뭘 더 바라겠나, 나고 자란 마을에서, 믿음 지키며 살아온 것만으로도 감사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