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호 장로

  • 김용호 장로님
    1933년 01월 01일에 핀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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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은 황해도 장연군 해안면 몽금포이며, 한국전쟁 중에 월남하여 1952년 너구 마을에 정착하였다. 부인박인숙권사(2015년 소천)와 1958년 결혼하여 2남 2녀를 두었다. 딸 김진주(58) 춘천에 산다. 아들 김치학(55) 포항 푸른초장교회 담임 목사이다. 딸 김치옥(52) 대전에 산다. 아들 김치경 (49) 곡강교회 장로이다.

김용호 장로님의 고향은 황해도 장연군 해안면이다. 19살에 6.25전쟁이 나고 인민군에 붙들려 다니다 후퇴할 적에 탈출해 목숨을 부지하려고 아군들 따라서 20살 때 여기로 내려왔다. 처음에는 남의 집 머슴살이를 했다. 돈도 못 받고 밥 얻어먹고 옷 얻어 입고 두 해쯤 살았다. 두 해쯤 사니 농사일도 익숙하고 조금씩 주는 돈 모아서 박인숙씨와 결혼하고 살림을 살았다. 부인은 흥해 출신으로 중매로 만나 결혼했다. 자녀는 아들 2명, 딸 2명을 두었다. 김치경씨가 막내이다. 결혼하던 해에 교회가 마을에 세워졌다. 11월에 결혼해 그때부터 교회 다니기 시작했다. 김용호씨는 황해도에 있을 때 교회 유치원에서 컸다. 이모가 유치원 선생님이라 외가와 친가 집안 또래들이 다 유치원을 다녔다. 믿음으로 갔다기보다는 이모를 보고 유치원을 보냈다. 크게 부자는 아니어도 밥은 굶지 않고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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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처음 동네 가운데 무덤 자리에서 예배를 시작했고, 다음에는 저녁에 마을회관 자리 남의 마당에서 예배를 드렸다. 저녁마다 예배에 참석하니까 차차 교인이 늘었다. 애가 아파서 온 사람, 자식이 없어서 자식 낳고 싶어서 온 사람, 가정에 불화가 있는 사람들이 모였다. 수가 점점 늘어서 현재 곡강교회가 있던 자리에 있는 집 마당으로 예배장소가 바뀌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정식으로 교회를 지으라고 누가 136평쯤 되는 감밭을 기증했다. 그 집 며느리가 교회에 나간다고 하니 시아버지가 부자라서 그 땅을 기증했다고 한다. 그때 나무로 교회를 짓기 시작했다. 포항에서 배로 나무를 죽천에 실어 놓고 여기까지 옮겼다.


그때 전도사로 온 사람이 동네 이장에게 요청하여 마을 사람들에게 재목 운반하는 데 도와달라고 하였다. 그러자 집집마다 소 있는 사람들은 아침 식전에 한 번씩재목을 날라주고 일을 하러 갔다. 참 하나님의 역사라고 생각한다. 일부 남은 재목은죽천사람들이 저녁에 예배드리러 오면서 하나 두 개씩 짊어지고 와서 날랐다. 지붕을만들어야 하는데 미군부대 텐트천막의 천을 위에 덮었다. 바닥에는 가마니를 깔아서앉았다. 벽은 대를 엮어서 초가집 만들 듯 흙벽을 만들었다. 비가 오면 비가 새서옹기나 세숫대야를 군데군데 놓았다. 그렇게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일 년도 못되어사나운 태풍이 불어 교회 벽에 바른 흙이 다 무너져 작대기만 남았다. 할 수 없이 새로흙을 파고 이겨서 벽을 안과 밖으로 발랐다. 태풍 피해자 보조를 보태서 천막포장을걷어내고 함석으로 지붕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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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마을이 가난해서 사람들이 도시로 떠나가기 시작했다. 거의 교인이 없을지경까지 갔다가 조금 부흥하기를 반복했다. 그러다가 황영백씨가 울산에서 이사를와서 둘이 협력하니 교회를 받들기가 좀 수월해졌다. 새마을 사업이 한창일 때 새로건물을 지었다. 잘 짓는다고 블록을 사서 교회를 지었다. 여기까지 차가 못 들어오니저 한동대에서 들어오는 그 근처에 자재를 가져다 놓고 저녁마다. 수요일에 예배드리고 나서 벽돌 한 장씩 이는 사람은 이고 지는 사람은 지고 아이들 어른들 할 거없이 협력해서 지었다. 그 건물을 짓고 오래 있었다. 이후로 교회를 새로 짓는다고 계획만 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바다 안 저 멀리에 나무가 보였다. 가까이 가서 보니 길이가 한 10미터쯤 되는 나무가 떠다니고 있었다. 이 나무를 물가에 묶어두고 교인들과 군인들이 힘을 합해 끌어냈다. 그 나무를 흥해제재소에서 제재해서 교회를 지었다.


하루는 황장로님이 저기 밭이 하나 났는데 교회지을 터로 사놓자고 했다. 빚을 내서 산 그 밭이 나중에 교회를 지을 때 자본이 되었다. 1996년도에 모든 교인들이 힘을 합해 지은 교회가 지금 건물이다. 이때 김종배장로님이 힘을 많이 썼다. 그때 IMF가 터졌는데 이 근방에 이렇게 빚 없이 헌당한 교회가 없었다. 김용호장로님은 부인 때문에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 교회 안 다니면 결혼을 안한다고 했는데 단박에 교회 다니는 아가씨를 만나 한 달 만에 결혼했다. 곡강 3동 살때도 부인과 함께 곡강교회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새벽기도를 다녔다. 부인은 기도만 하면 매번 울었다고 한다. 교회 중고등학생이 40명에서 50명 되었는데 그 학생들 다밥을 먹이고 교회 행사할 때마다 밥을 다 해다 먹이고 그래서 별명이 '밥집사'였다. 부인 박인숙권사님은 결혼해서 58년 만에 세상을 버렸다. 2년만 더 살았으면 교회 60년 기념이라고 함께 좋아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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