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 왔을 때가 70년대 박정희정권 때인데 온 나라에 새마을 바람이 불었다. 처음 왔을 때는 대밭 속에 초가삼간이었고 마을에 오솔길만 있었다. 새마을 운동을 시작하고 이석분씨 보고 부녀회장을 하라고 해서 10년간 부녀회장을 하고 영백씨는 마을 정화위원 겸 개발위원으로 일했다. 영백씨는 마을에 이사를 와서 주일학생들을 데리고 마을 길청소를 했었다. 자신이 전에 살던 마을은 새마을 운동 때 우등상도 받은 마을이어서 길에 부스러기도 없고 담장도 깨끗하게 해놓고 사는 걸 보고 배웠는데 여기 오니 참으로 추접했다. 그래서 길이라도 쓸어야겠다고 생각해 그렇게 했고 흉을 봐도 끝까지 했다. 마을 앞의 농로도 비포장으로 질었는데 자신이 노력해서 포장이 되게 하였다. 천마지 저수지가 생기기전에 여기서 농사짓기가 정말 어려웠다. 비 안 오면 모를 심지 못하는 지경이었다. 그러다 81년도에 석분씨가 추천을 받아 최초로 여성 후계자가 되었다. 후계자가 되면서 후계자 지원금이 나오는데 그 돈으로 소를 샀다고 했다. 그렇게 소를 키워 팔아서 자녀들 공부도 시키고 논도 몇 십 마지기 샀다.
이석분씨는 원래 냉수가 고향인데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울산 약수로 이사를 왔다. 울산에 살 때 성경고등학교를 나와 신학교가려다 안가고 교회를 섬기고 있었다. 그 교회도 옛날 곡강교회처럼 너무 어렵고 힘들었다. 성경학교 선생님을 했는데 전도사라고 불릴 정도였다. 그때 황영백씨가 상옥에서 울산으로 이사를 왔다. 처음에 황영백씨는 교회를 안 다녔다. 그래서 예수 믿는 조건으로 결혼하자고 했다.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차츰 믿음이 성장해 곡강에 와서 안수집사가 되고 장로로 피택 받아 교회를 섬기고 지금은 은퇴해 잘 살고 있다.
장로님은 지게를 지고 품팔이를 해 아이들을 다 대학에 보냈다. 자녀들은 다 결혼해서 예수 믿는 며느리도 둘이나 있고 사위도 예수 믿는다. 한 명은 울산조선소 앞에서 식당을 했었고 둘째 아들은 부산 전철 2호선 기관사를 한다. 손녀는 비행기 스튜어디스하다 시집가서 현재 목사 부인이다. 막내아들은 이권사님이 낳았는데 항공정비학교 나와서 요새는 농사를 짓는다. 곡강 교회에서 안수집사를 했다. 이권사님은 황장로님을 선택한걸 후회하지 않는다고 한다. 황장로님도 마찬가지로 이권사님과 결혼한 걸 후회하지 않는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