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원집사님

  • 박병원 집사님
    1938년 12월 07일에 핀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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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천에서 태어나, 오천에서 살아온 내 인생

업로드중입니다.나는 영덕군 지품면 오천2리에서 태어나서, 지금까지 쭉 이 마을을 떠난 적이 없네. 태어난 집도 여기, 지금 살고 있는 집도 여기지. 어릴 적엔 오천1리 쪽에 큰집이 있어서 형제들하고 같이 살다가, 내가 살림을 차리면서 이쪽으로 내려왔지. 그래서 내 삶의 시작도, 끝도 오천이 될 것 같아. 형제는 일곱 남매였는데, 난 그중 셋째였어. 그 시절엔 형제 많은 집이 흔했지. 형님은 참 똑똑했어, 그 시절에 대학교까지 다녔으니까. 근데 나는... 6학년 2학기 때 학업을 멈췄지. 6.25 전쟁이 터지고, 아버지 돌아가시고, 할아버지가 우리를 이끄셨거든. 학교 대신 똥지게를 지고, 소 오줌이고 사람 똥이고 모아서 보리밭에 뿌리고, 그게 우리 밥줄이었으니. 할아버지는 참 신실한 분이었지. 산에 올라가 밤마다 하나님께 빈다고 기도하시던 분. 시장에 가셔도 꼭 과일 하나 사 오셔서 하나님께 드리고, 그 믿음이 내게도 전해졌어. 우리는 가난했지만, 그 안에 뭔가 든든한 게 있었어. 할아버지 덕에 땅도 조금 사고, 삶의 방향도 조금씩 나아갔지. 나는 학교도 못 마쳤고, 배운 것도 없지만, 하나님이 이 오천 땅에서 내게 맡기신 게 있었다고 생각해. 농사짓고, 교회 섬기고, 자식들 키우고, 그것으로 내 인생을 채웠지. 지금 돌이켜보면, 참 평범하고도 고마운 삶이었다네. 뭘 더 바라겠나, 나고 자란 마을에서, 믿음 지키며 살아온 것만으로도 감사하지.

6.25 전쟁의 기억과 금광굴 속 피난살이

내가 어릴 적 겪은 제일 큰 일 중 하나가 바로 6.25 전쟁이었어. 그땐 정말 정신없는 시대였지. 총성이 들리고, 하늘에 비행기가 윙윙대고, 어디서 포탄이 떨어질지 몰라서 늘 불안했어. 우리 오천에도 북한군이 들어왔었거든. 병원 자리에 진을 치고, 총알 닦고 포탄 정비하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해. 어린 마음에 겁도 났지만, 그땐 그냥 그런 게 사는 거라 생각했지. 우리는 마을 근처 금광 굴로 피난을 갔어. 금천이라는 이름도 그 금광에서 나왔지. 일제 시대엔 일본 사람들이 여기서 금을 캐고 살았는데, 그 굴이 전쟁통엔 피난처가 됐어. 안에 들어가면 꽤 깊었고, 포탄이 날아다녀도 그 안은 좀 안전했거든.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들고, 서로 의지하며 버텼어. 지금 생각하면 참 아슬아슬한 일이었지만, 그때는 그냥 ‘사는 게 이런 거구나’ 하면서 버텼지. 어느 날은 미군 비행기가 저 위를 돌더니, 갑자기 도람통 같은 게 툭 떨어졌어. 그게 폭탄이었지. 불이 확 났고, 마을 몇 채가 불타고 말았어. 우리 할아버지는 그걸 보고 얼른 멍석 덮어서 지붕을 보호하려고 하셨지. 사람 살고 집 있고, 그런 마을이 하루아침에 불바다가 될 줄 누가 알았겠어. 전쟁은 정말 무서운 거야. 그래도 그때 느꼈던 게 있어. 하나님께 붙잡히지 않으면 마음이 무너진다는 거. 굴 안에서 기도하던 사람들, 무서움 속에서도 찬송을 흥얼거리던 어르신들... 그 모습이 내 믿음의 시작이었는지도 몰라. 피난살이 속에서 배운 건, 사람은 약하지만, 하나님은 강하다는 거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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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고 살기 위해 학교 대신 진 똥지게

나는 초등학교 6학년 2학기까지 다니다가, 더는 학교에 가지 못했어. 전쟁도 한몫했지만, 가장 큰 이유는 먹고살기 힘들어서였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할아버지가 우리 일곱 남매를 거느리고 집안을 이끌어야 했거든. 근데 할아버지 연세가 있으시니, 들일을 하기도 어렵고, 결국 내가 집안일을 맡게 된 거야. 그중 제일 기억에 남는 게 똥지게였어. 요즘 애들은 상상도 못 하겠지만, 그 시절에는 사람 똥, 소 오줌, 닭 똥까지 긁어 모아서 논밭에 뿌렸어. 새벽이면 지게에 퍼 담아 메고, 밭으로 나갔다가 두 번 세 번씩 실어 나르고, 바람 불면 냄새에 코가 마비될 지경이었지만 그게 우리 삶이었어. 아침밥도 안 먹고 일하러 나가는 날이 많았지. 그때는 그저 '살아야 하니까' 했던 일이었는데, 지금 와서 돌아보면 참 대단했다 싶기도 해. 어린 손으로 지게를 메고 진흙 밭을 오가면서, 나도 모르게 인생을 배웠던 것 같아. 책임이라는 게 뭔지, 가족이 뭔지, 하나님이 왜 우리를 먹이시고 입히시는지를 몸으로 깨달은 시간이었지. 그 똥지게를 메고 가면서도 속으론 찬송가를 흥얼거렸어.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 이 찬송이 입에 붙어 있었지. 냄새나는 현실 속에서도 찬송을 부르면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졌거든. 하나님이 그 지게도 함께 메고 계신 것 같았달까. 그렇게 나는 글보다 삶으로 하나님을 배웠고, 그게 내 인생의 신앙학교였지.


군복무, 그리고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만남

나는 스무 살 좀 지나서 군대를 갔어. 1959년도, 6월 25일로 기억하는데, 논산 훈련소에 입소해서 처음 군복을 입었지. 화천이라는 곳에서 복무했는데, 그땐 전방이라 긴장도 많았어. 철책 따라 걸으며 보초 서고, 진지 공사도 하고... 젊은 나이에 세상 쓴맛 단맛을 다 봤다고 해야 하나. 그러다가 참 고맙게도, 좋은 분을 만나게 되었지. 제대할 무렵 마지막 휴가를 나왔는데, 그때 지금의 내 아내를 만나게 된 거야. 뭐 요즘처럼 연애하고 그런 건 아니고, 할아버지 손에 이끌려 가봤더니 인상이 참 반듯하고 마음에 들더라고. 요즘 말로 하면 첫눈에 '괜찮다' 싶었던 거지. 그게 인연이 되어 결혼을 하게 됐고, 평생을 함께 살아왔지. 그 사람은 참 지혜로운 사람이야. 젊을 적부터 책을 좋아했고, 기억력도 좋아서 한 번 들은 건 잊질 않더라고. 내가 못 배운 걸 그 사람은 어느 정도 채워준 셈이지. 우리 둘이 오천교회를 같이 지켜오고, 자식 넷 낳아 키우며 살아왔으니, 이보다 더한 복이 어딨겠나. 군대에서 있었던 일 중에 기억나는 게 많아. 한 번은 양구에 있는 부대 중위가 날 좋게 봤는지, 고향 부대로 전출시켜주더라고. 그 덕에 대구에서 근무할 수 있었고, 군수부대에서 물품 정리도 맡고, 열차로 물자도 실어 나르면서 배운 게 많았어. 영어는 못 했지만, 부속번호를 외워가며 일했지. 그게 다 지금 생각해 보면 하나님이 주신 훈련이었던 것 같아. 내게 책임감을 가르치신 거지. 그렇게 군 생활도 마치고, 가정도 꾸리고... 내 인생에 큰 줄기 하나가 그때 생긴 거야. 하나님이 다 예비하신 길이었다고 믿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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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천교회 개척부터 동행한 믿음의 길

나는 오천교회가 처음 생길 때부터 그 자리에 있었어. 그때 허덕만이라는 분이 옹기 사업을 하면서 교회 일을 시작했는데, 나는 어린 시절부터 그분 따라다니며 교회를 들락날락했지. 그 시절 교회란 게 지금처럼 번듯한 건물도 아니고, 그냥 흙바닥에 벽도 제대로 없는 그런 곳이었어. 그래도 이상하게도 마음은 편안했지. 기도하고 찬송 부르고, 말씀 듣는 그 자리가 내겐 참 따뜻했어. 그때부터 지금까지, 오천교회는 내 인생의 중심이었어. 나는 이 교회를 내 집보다 먼저 지었고, 교회 차량을 우리 차보다 먼저 샀고, 뭐든 교회가 우선이었지. 어떤 사람은 그걸 두고 '너무 앞서간다'고도 했지만, 나는 그렇게 살아도 후회가 없어. 하나님께 드리는 일이 먼저고, 그게 내 삶의 기쁨이었으니까. 교회 건물도 여러 번 바뀌었지. 처음엔 브로커 건물, 다음엔 흙집, 그리고 지금의 교회까지. 김용관 전도사님 오셨을 때 큰 결심을 하고 새로 건축했어. 전도사님은 경주에 있던 자기 집까지 팔아서 교회 건축 헌금을 하셨고, 나도 가진 것 아끼지 않고 드렸지. 다른 사람들은 “왜 그렇게까지 하냐”고 했지만, 나는 그게 하나님 앞에 마땅한 일이라 생각했어. 나는 늘 그랬어. 이 교회는 내 삶의 증인이었고, 하나님의 집이었거든. 오천교회가 없었다면, 지금의 나도 없었을 거야. 자식들도 다 그 교회에서 자랐고, 지금도 그 자리에 있고. 내가 이 교회와 함께 걸어온 시간은, 곧 하나님과 동행한 시간이었어. 그래서 감사해, 지금까지도 이 자리에 앉아 예배드릴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교회가 먼저 – 집보다, 차보다, 먼저 드린 마음

사람들이 내게 묻더라, 왜 그렇게까지 교회에 다 걸었냐고. 그럴 때 나는 늘 이렇게 대답했지. "하나님이 먼저인데, 내가 가진 걸 어찌 먼저 쓸 수 있겠나." 나는 집을 짓기 전에 교회를 먼저 지었고, 우리 집 차보다 교회 차량을 먼저 샀어. 그게 나한테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었지. 교회 건축할 때, 헌금이 부족했어. 작정 헌금 몇 번 하고, 타 교회 도움도 받았지만 모자랐지. 그때 남은 금액의 3분의 1을 내가 채웠어. 누가 보면 "무리했다" 할 수도 있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 안 해. 하나님께 드리는 일인데, 내가 가진 걸 아끼는 게 더 이상했을 거야. 그 돈이 내 돈이 아니라 하나님 거라 생각했거든. 교회 차도 마찬가지였지. 봉고차 한 대 사려고 했는데 돈이 또 부족했어. 그때도 내가 또 보탰지. 성도들이 많이 낼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으니까. 노인들, 아이들, 농사짓는 사람들... 나라도 나서야 했다 싶었어. 근데 신기한 게, 그렇게 드리고 나면 마음이 더 평안해지는 거야. 하나님이 받으시고 기뻐하신다는 게 느껴졌어. 누가 나더러 장로급 사역자라고도 하고, 교회의 기둥이라고도 하는데, 나는 그냥 ‘하나님께 드리는 일꾼’이라 불리는 게 제일 좋더라고. 이 교회가 든든히 서야, 다음 세대들도 그 믿음 위에 설 수 있지 않겠나. 그래서 나는 언제나 교회를 먼저 생각했어. 지금도 그 마음은 변함이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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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진 건 하나님 것이지

오천교회를 새로 지을 때, 헌금이 턱없이 부족했어. 전도사님이 집까지 팔아가며 헌신했고, 성도들도 작정 헌금을 몇 차례 했지만, 그래도 3천만 원 예산 중에 3분의 1이 모자랐지. 아무리 계산을 해도 나올 수 없는 숫자였어. 그때 나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어. 그 부족한 3분의 1, 하나님 앞에 내가 채워야겠다 생각했지. 사람들이 그랬지. “왜 그렇게 무리하느냐”, “당신 자식들은 어쩌고”, “자기 집 먼저 챙겨야지.” 그런데 내 마음엔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어. 내가 가진 건 다 하나님의 것이고, 하나님의 집이 먼저 채워져야 내 집도 복을 입는다고 믿었거든. 그 믿음 하나로 드린 거야. 사실 나도 넉넉한 형편은 아니었지. 서울에 있는 자식들은 지하방 얻어 살고 있었고, 어떤 사람은 내게 전지를 팔아 자식에게 주라고도 했지. 근데 나는 그 말에 대답조차 안 했어. 내 마음속에선 이미 결정된 일이었으니까. 그리고 그 일이 하나님 앞에 드린 헌신이라는 게 분명했어. 지금 생각하면, 그때의 결정이 내 삶의 큰 은혜였던 것 같아. 교회가 세워지고, 예배가 살아나고, 아이들이 자라나고… 그 중심에 내가 드린 마음이 함께 있었으니까. 누구에게 자랑할 것도 아니고, 대단한 일도 아니야. 다만, 나는 그때 하나님께 이렇게 말한 것 같아. “하나님, 이 부족한 걸 제가 채우겠습니다.” 그리고 그걸로 충분했지.


목회자와 교회를 위한 눈물과 기도

오천교회가 여기까지 오기까지, 나는 기도 없이는 버텨낼 수 없었어. 때로는 밭에 나가 사과나무 붙잡고 기도했고, 어떤 날은 밤에 혼자 산에 올라가 하나님께 속삭였지. “하나님, 우리 교회를 지켜주십시오.” 그 기도가 내 하루의 시작이었고, 삶의 중심이었어. 김용관 전도사님이 계셨을 때 일이야. 전도사님이 교회 건축을 위해 자기 집도 팔고, 생활비도 아껴가며 헌신하셨지. 사모님은 서울 교육받으러 갔다가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났고, 그 장례도 겨우 치렀어. 나는 그 모습을 보며 마음이 아팠고, 그 아픔을 기도로 달랬어. 전도사님을 위해, 교회를 위해, 하나님 앞에 무릎 꿇었던 시간이 많았지. 나중엔 교회 화장실도 바꾸고, 천장도 다시 하고, 벽도 고치고, 찬송가 자막 나오는 장비도 설치했지. 목사님 사례비도 다 충당하며, 교회를 위한 일에 마음 아낌 없이 드렸어. 그런데 말이야, 그 모든 수고가 고생이 아니었어. 내가 가진 사랑을 하나님께 드리는 일이었으니까. 지금까지 수많은 목회자들이 오고 갔지만, 나는 항상 한 가지 바람이 있었어. “우리 교회에 참된 목회자가 와서 오래도록 성도들과 함께하기를.” 지금 오신 목사님이 그 바람에 대한 응답 같아. 기도는 헛되지 않아. 눈물로 심은 씨앗은 언젠가 반드시 열매가 되니까. 나는 그렇게 믿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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