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남순권사

  • 허남순 권사님
    1948년 03월 08일에 핀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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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허 속에서 들려온 복음의 첫 노래”

6.25 전쟁 직후, 삶은 가난했고 마음은 허기졌습니다. 영덕 시골 마을, 일본군 잔재로 남은 가옥에 미국 선교사 부부가 들어왔고, 아이들에게 찬송과 성경을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 사랑하심은…” 찬양을 듣고 처음 교회에 간 날, 제 마음 한가운데 따뜻한 불이 붙었습니다. 비포장 진흙길을 맨발로 걷고, 성경은 한 권도 없었지만, 말씀은 입으로 전해지고 마음에 새겨졌습니다. "예수님이 너를 사랑하신다"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그 사랑이 어떤 건지 몰랐지만 마음이 울었습니다. 전쟁으로 아버지를 잃은 친구들과 함께 예배당에서 울다 웃던 그 날들이, 제 인생의 믿음의 씨앗이 심긴 날들이었습니다.

“부흥 속에서 주님을 만나다”

청춘의 도시 대구, 생계를 위해 공장에서 일하던 시절. 때때로 외로움에 지치고, 눈물에 잠기던 밤이면, 작은 교회를 찾아 기도했습니다. 그 시절 한국교회는 부흥회와 기도운동이 활발했고, 저도 산상부흥회에서 방언과 눈물의 은혜를 체험했습니다. 함께 기도하던 청년들과 말씀을 붙들고 전도하며 보낸 시절은, 지금 돌아보아도 찬란했습니다. "하나님, 제 인생을 쓰시옵소서"라는 고백을 수없이 올렸고, 그때의 순수한 헌신은 제 삶의 방향을 바꾸었습니다. 친구들은 연애하고 세상 재미를 좇았지만, 저는 예배드리는 시간이 가장 행복했습니다. 교회가 내 집 같았고, 하나님이 진짜 나의 아버지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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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이라는 작은 교회를 세우다”

1966년, 영덕의 청년과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시골 살림을 시작했습니다. 전기도 제대로 들어오지 않던 마을에서, 아이를 업고 비 오는 날도 예배당으로 향했습니다. 이 시기 한국교회는 도시에서 폭발적으로 성장했지만, 시골 교회는 촛불 아래에서 예배드리는 일상이었습니다. 남편은 농사일로 지쳤지만, 저는 아이들에게 성경 이야기를 들려주며 가정을 ‘작은 교회’로 세워가고자 했습니다. 부활절이면 아이들과 꽃을 꺾어 십자가를 꾸미고, 성탄절이면 바느질로 천사 옷을 만들었습니다. 기도와 찬양, 말씀과 눈물이 어우러졌던 그 시간은, 지금도 가장 복된 시절이었습니다. 집 안에 성경책은 단 한 권이었지만, 믿음은 넉넉했습니다.


“교회의 기둥이 되어”

여전도회 회장, 주일학교 교사, 찬양대 지휘… 교회 안에서 할 수 있는 모든 사역을 맡았습니다. 산업화로 젊은이들이 도시로 떠나고 시골 교회가 쇠퇴할 무렵, 남은 어르신들과 아이들을 품고 다시 주일학교를 세우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엔 아이 셋, 그 아이들이 친구를 데려오고 마침내 마을 전체가 함께 찬양하게 되었습니다. 한국교회는 도시에서 대형교회를 세워가고 있었지만, 나는 흙먼지 나는 마룻바닥 위에서 아이들과 함께 "예수님이 너를 사랑해"를 외쳤습니다. 때로는 이웃의 비난과 오해도 있었지만, 섬김의 자리가 곧 기도의 자리였고, 제 삶의 가장 큰 기쁨이었습니다. 그 시절, 주님은 매주 제게 새 힘을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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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 같은 시절, 주님을 더 깊이 만나다”

갑작스런 남편의 투병과 죽음, 그리고 경제적 어려움은 제게 인생 최대의 광야였습니다. 매일이 눈물의 기도였고, 밤마다 하나님께 되묻곤 했습니다. “주님, 왜 이런 고통을 주시나요?” 하지만 주님은 묵묵히 말씀으로 제게 응답하셨습니다. “내가 너를 안다, 너와 함께 있다.” 새벽기도, 철야예배, 기도원에서 보낸 시간들은 제 믿음을 더욱 단단하게 했습니다. 한국교회는 이 시기 기도원과 부흥운동으로 불처럼 타오르던 때였고, 저 또한 눈물로 제 인생을 다시 맡겼습니다. 어느 날, 말씀 묵상 중에 깨달았습니다. 주님은 결코 나를 홀로 두신 적이 없다는 것을. 고난은 내 믿음을 연단했고, 그 안에서 주님의 사랑은 더 깊어졌습니다.


“다시 사명 위에 서다”

아이들이 출가하고 삶의 여백이 생기자, 저는 다시 교회와 마을을 섬기기 시작했습니다. 노인정에서 성경을 가르치고, 지역 아동센터에서 아이들과 찬양하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때론 버스를 타고 먼 시골까지 찾아가 한 사람의 할머니에게 말씀을 전했습니다. “권사님 덕분에 예수 믿어요.” 그 말 한마디가 제 인생의 보상이었습니다. 이 시기 교회는 사회와의 갈등 속에서 고민하던 때였지만, 저는 조용히 ‘한 영혼’을 품는 사역에 헌신했습니다. 내 삶은 작지만, 주님은 크셨고, 내 말은 짧지만 복음은 강했습니다. 나를 쓰시는 하나님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리며, 하루하루를 선물처럼 살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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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유산을 손주들에게”

손주들이 태어나고, 저는 ‘기도하는 할머니’가 되었습니다. 어린 손자에게 요셉 이야기를 들려주고, 손녀와 함께 주일학교에 가며, 찬송가를 가르치는 시간이 제게 가장 큰 기쁨이었습니다. 한국교회는 여러 비판에 직면하고 있었지만, 저는 더욱 확신했습니다. “말씀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음 세대는 우리의 기도를 먹고 자란다.” 손주들이 찬양할 때 저는 몰래 눈물을 흘렸고, 하나님께 중보기도로 그들의 미래를 맡겼습니다. 세상의 변화보다도, 한 사람의 영혼이 하나님 품에 돌아오는 일이 더 가치 있다는 것을 깨달았던 시절이었습니다. 믿음은 말로 전해지기보다, 삶으로 보여지는 것임을 배웠습니다.


“주님 한 분이면 충분했습니다”

여든을 넘긴 지금, 무릎은 약해졌지만 마음은 여전히 뜨겁습니다. 주일엔 가장 좋은 옷을 꺼내 입고, 손자 손녀 손을 잡고 예배당으로 갑니다. 이제는 봉사보다 기도와 축복이 저의 사명입니다. 창밖을 보며 성경을 읽고, 교회 소식지를 보며 다음 세대를 위해 기도합니다. “하나님, 제가 여기까지 온 건 오직 은혜입니다.” 삶의 굴곡과 고통, 기쁨과 감사가 모여 이 자리까지 왔습니다. 지금은 과거의 이야기를 돌아보며, 후배들에게 말해줍니다.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거야.” 내 인생을 통해 한 사람이라도 위로받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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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은 너희의 가장 귀한 유산이란다”

사랑하는 우리 자녀들아, 이제 엄마가 여든아홉이 되었구나. 거울을 보면 주름진 얼굴이지만, 마음은 여전히 너희를 처음 품었을 때처럼 따뜻하고 감사하단다. 엄마는 배운 것도 없고 가진 것도 많지 않았지만, 하나님을 믿는 믿음 하나는 놓치지 않으려고 평생을 살았단다. 새벽마다 무릎 꿇고 너희 이름을 부르며 기도했던 날들이 이제는 오래된 추억처럼 남아있지만, 그때마다 하나님께서 엄마에게 주신 평안은 지금도 생생하구나. 너희가 아프거나 방황할 때, 엄마는 말로 도울 수 없어도 기도로 붙들었단다. “하나님, 제 자녀를 지켜주세요. 이 아이들이 사람의 말보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해주세요.” 그렇게 기도했지. 이제는 너희가 각자의 자리에서 가정을 이루고, 아이를 키우고, 바쁜 일상을 살아가고 있지만… 엄마는 여전히 너희가 예배를 놓치지 않고, 감사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는 게 가장 큰 기쁨이란다. 부디 기억해다오. 엄마가 남긴 집이나 물건보다 더 귀한 건, 너희 마음에 심어진 믿음의 씨앗이란 걸. 세상은 변하지만, 예수님의 사랑은 변하지 않단다. 혹시라도 삶이 지치고 외로울 때면, 성경을 펴고 찬송 한 곡 불러보렴. 그 안에 엄마가 평생 만난 하나님이 계실 거야. 너희를 늘 축복하고 사랑하는 엄마가


“주 안에서 함께한 시간이 제 인생의 기쁨이었습니다”

사랑하는 교회 가족 여러분께, 주 안에서 평안을 전합니다. 여든아홉 해를 살면서, 제가 가장 감사한 건 이 교회 공동체 안에서 살아갈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어릴 적 영덕의 작은 시골 예배당에서 시작된 제 믿음은, 이곳에서 더욱 단단해졌고, 더 넓어졌습니다. 주일 아침마다 여러분과 함께 예배드리고, 새벽기도에서 눈물로 기도하며 손 맞잡고 찬송 부르던 그 시간이 저에겐 천국의 일부였습니다. 저는 가진 것이 많지 않은 사람이었지만, 늘 마음 깊이 품었던 소망이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이 교회가 말씀 위에 굳건히 서고, 다음 세대가 복음 안에 살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주일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여전도회에서 음식 준비하며, 작지만 진심을 담아 섬기려 했습니다. 어떤 날은 마음 상할 일도 있고, 힘겨운 날도 있었지만, 돌아보면 그 모든 순간이 저를 연단하신 하나님의 손길이었습니다. 그 과정 속에서 여러분의 따뜻한 격려와 기도는 제게 큰 위로와 힘이 되었습니다. 지금은 건강이 예전 같지 않아 자주 움직이진 못하지만, 여전히 저는 교회와 여러분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강단에서 선포되는 말씀이 살아 움직이고, 우리의 찬양과 기도가 이 마을을 밝히는 등불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혹시 제 인생의 마지막이 가까워진다 해도, 저는 두렵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교회 안에서 주님을 만나고, 여러분과 함께 예배드렸다는 사실이 저의 자랑이고 위로이기 때문입니다. 끝까지 이 믿음의 길을 함께 걸어가요. 주님 오시는 날까지, 우리 모두 믿음 잃지 맙시다. 늘 주 안에서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허남순 권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