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리의 이름으로 살아낸 신앙의 길”

  • 최승리 권사님
    1963년 01월 01일에 핀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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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의 이름으로 살아낸 신앙의 길”

행암교회 최승리 권사님의 삶은 한 편의 신앙 드라마입니다. 충남 예산에서 태어나 도시의 삶을 떠나 다시 시골로 돌아오기까지, 그녀의 인생은 수많은 고난과 전환점을 지나왔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과정 가운데 중심에 있었던 것은 바로 '하나님'이셨습니다. 이름처럼 승리의 인생을 살아낸 권사님은, 단순히 자신의 어려움을 극복한 한 여인의 이야기를 넘어, 하나님의 은혜로 재건된 가정과 교회를 세워가는 믿음의 증거자입니다. 남편의 변화, 자녀를 향한 기도, 떡집 운영과 영어공부에 이르기까지 그녀의 일상은 모두 복음으로 이어집니다. 이 글은 최승리 권사님의 55분 간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신앙과 삶이 하나 된 9가지 주제를 중심으로 정리한 특집기사입니다.

이름으로 받은 사명: ‘승리’가 된 이유

권사님의 삶에서 ‘승리’라는 이름은 단순한 호칭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새로운 정체성과 사명의 시작이었습니다. 도시에서 상처 입은 가족을 데리고 시골로 내려온 어느 날, 그녀는 반복되는 예배의 메시지를 통해 “넌 승리했다”는 음성을 확신하게 됩니다. 그 말씀대로 그녀는 새로운 이름 ‘최승리’로 등록하며 다시 살아가기로 결단합니다. 이름을 바꾼다고 삶이 곧바로 달라지진 않았지만, 그 이름은 앞으로 걸어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는 나침반이 되었습니다. 권사님은 이 이름을 통해 낙심의 골짜기에서 방향을 잃지 않았고, 매 순간을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 해석하며 살아갔습니다. 이름이 바뀐 이후 교회 공동체 내에서도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이들이 생겼고, 권사님은 '승리'라는 이름에 합당한 믿음의 삶을 살기 위해 더 기도하고 더 낮아졌습니다. 심지어 일상에서 이름을 부를 때마다 하나님이 주신 약속을 다시 떠올리는 도구가 되기도 했습니다. 이름이 바뀐 날부터 그녀는 단지 새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승리를 증거하며 살아가는 자로 헌신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이름으로 오늘도 권사님은 자신의 자리에서 믿음으로 승리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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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으로 피워낸 믿음의 꽃

권사님의 신앙은 고난 속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남편의 오랜 방황과 술, 도박, 외박은 가정을 무너뜨렸고, 큰아들은 어린 나이에 “엄마, 내가 짜장면 배달해서 먹여줄 테니 아빠랑 이혼해”라고 말할 정도로 절망에 빠졌습니다. 자녀들의 눈물은 권사님에게 큰 고통이었지만, 그녀는 원망을 기도로 바꾸기로 결단했습니다. 금식하며 기도하고, 새벽예배에 나가며 눈물로 시간을 보냈습니다. 원망의 마음도 많았지만, 어느 순간 남편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생겼고, 그때부터 하나님의 위로가 임하기 시작했습니다. 새벽마다 가정을 위한 기도를 올렸고, 아침이면 떡을 팔러 나가면서도 속으로는 찬송을 부르고 기도하며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특히 떡을 만들며 “이 집안이 하나님께 쓰임 받게 해주세요”라고 중얼거리는 그 기도는 일상의 예배가 되었습니다. 그녀의 인내는 결국 남편의 회심으로 이어졌습니다. 남편은 이제 예배를 사모하는 사람이 되었고, 자녀들 역시 어머니의 기도에 힘입어 믿음 안에서 다시 일어서고 있습니다. 고난은 그녀를 부수지 않았고,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정금같은 믿음으로 단련시키는 시간이었습니다.


하나님과의 독대: 절망 속에서 찾은 확신

삶의 가장 어두운 밤, 권사님은 소주 한 잔을 마신 후 하나님 앞에 엎드려 울부짖었습니다. “이제 더는 책임질 수 없습니다. 데려가 주세요.” 그 기도는 단지 절망이 아니라, 포기라는 단어조차 무너진 끝의 외침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기도를 외면하지 않으셨고, 다음 날 권사님은 놀라운 평안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날 밤은 영적 싸움의 밤이었고, 권사님은 아이들 앞에서 통곡하며 기도했습니다. 아들들은 어머니를 지켜보며 가슴 아파했고, 남편은 그 모습을 보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날 이후 남편의 도박은 완전히 끊어졌고, 가정은 회복의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권사님은 그 밤을 통해 하나님은 자녀를 절대로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진리를 삶으로 깨달았습니다. 이후 그녀는 어떤 고난 앞에서도 “하나님은 나를 아신다”는 확신 하나로 버틸 수 있었습니다. 다시는 그와 같은 기도는 하지 않았지만, 그날 밤을 기점으로 그녀는 하나님 앞에 무릎 꿇는 삶을 살게 되었고, 매 순간 자신을 지키는 분이 계심을 의식하며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그 기도의 밤은 권사님의 인생에 있어 가장 강렬한 영적 전환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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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중심, 말씀과 새벽 예배

권사님에게 신앙은 생활이자 생명입니다. 하루의 시작은 항상 새벽예배였고, 매주 주일 설교는 삶의 지침이 되었습니다. 예배 중 찬양 속에서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하나님의 음성을 느꼈고, 그 감격은 한 주를 살아가는 힘이 되었습니다. 고난 가운데 답답하고 길이 보이지 않을 때마다 하나님은 말씀이 살아 역사함을 직접 보여주셨습니다. 권사님은 말씀을 필사하며 매일 묵상했고, 말씀 구절을 손자들에게도 전하며 함께 나누었습니다. 특히 말씀을 암송하고 예배 중 받은 감동을 기록하며 스스로의 신앙을 점검해나갔습니다. 그녀는 예배를 단순히 드리는 시간이 아닌,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응답받는 자리로 여기며 지금까지도 그 자리를 놓치지 않고 지켜가고 있습니다. 자녀와 손주들이 예배에 함께 나오는 날이면 그 날 설교 말씀을 모아 따로 묵상 노트에 적어두기도 했습니다. 말씀은 그녀의 삶을 비추는 등불이었고, 새벽예배는 어둠 속에서 하루를 여는 희망의 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선으로 바꾸신다 – 로마서 8:28

권사님의 인생 전체를 설명할 수 있는 말씀이 있다면 단연코 로마서 8장 28절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 이 말씀은 권사님이 고난의 시간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믿음을 지켜낼 수 있었던 이유였습니다. 남편의 변화도, 자녀들의 성장도, 모두 이 말씀을 중심으로 해석되었습니다. 권사님은 어려운 일 가운데서도 “이것도 선으로 바뀔 것이다”라는 믿음을 가졌고, 그 믿음은 실제 삶을 변화시켰습니다. 사업 실패나 건강 문제도 하나님의 훈련으로 받아들이며 더 견고한 믿음을 키워왔습니다. 권사님은 이 말씀을 매일 묵상했고, 새벽마다 기도하며 이 진리를 자녀들에게도 심어주었습니다. 자녀들은 어머니의 태도를 통해 신앙의 실체를 보았고, 지금은 그 말씀을 각자의 삶에서 붙들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권사님의 삶 자체가 바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살아 있는 증거가 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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떡집 사장, 선교의 꿈을 품다

권사님은 식품영양학을 전공하고 영양사로 일한 경험을 살려 시골에서 떡집을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생계를 위한 선택이었지만, 이 공간은 점점 하나님의 일하심을 경험하는 선교의 현장이 되어갔습니다. 이른 새벽부터 찹쌀을 불리고, 떡을 만들며 기도하는 일상은 권사님에게 또 다른 형태의 예배였습니다. “이 떡을 먹는 이들에게 기쁨이 되고, 이 가게가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곳이 되게 해주세요.” 권사님은 떡을 만들며 그렇게 중얼거렸고, 실제로 많은 손님들이 따뜻한 인사와 함께 위로를 받고 돌아가기도 했습니다. 남편이 정년을 맞으며 가게를 함께 운영하게 되었고, 그 시간을 통해 두 사람의 관계는 더욱 깊어졌습니다. 수익은 자녀의 학비, 교회 헌금, 선교 후원 등으로 이어졌고, 이 작은 가게는 복음의 확장 통로가 되었습니다. 권사님은 지금도 “내가 가진 것이 작아도 하나님은 얼마든지 선하게 쓰신다”는 믿음으로 떡집을 섬기고 있습니다. 떡집은 그녀의 손끝에서 만들어지는 사랑의 증거이며, 하나님 나라의 한 조각입니다.


영어 10년 배움, 외국인을 위한 복음 준비

외국인 근로자들이 많은 지역적 특성상, 권사님은 언젠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야겠다는 마음을 품게 되었습니다. 그 시작은 단순히 영어를 배우는 일이었습니다. “10년만 배우면 통하겠다”는 다짐으로 권사님은 영어 회화 학습을 시작했고, 쉬운 단어 하나하나를 배우며 매일 기도했습니다. 권사님에게 영어는 단순한 언어가 아닌 선교의 도구였습니다. 가게에 찾아오는 외국인 손님에게 “God bless you” 한마디를 전할 수 있게 된 것도 그녀에겐 큰 기쁨이었습니다. 영어를 배우는 동안 시행착오도 많았고, 나이가 들수록 암기가 쉽지 않았지만, 권사님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때로는 영어 성경을 읽고, 찬양을 따라 부르며 발음을 익혔습니다. 교회 내에서도 외국인을 위한 예배를 꿈꾸며 준비하고 있으며, 장차 영어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순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권사님은 “언어는 핑계가 될 수 없다”는 믿음으로, 늦은 나이에라도 순종의 발걸음을 내딛고 있습니다. 그녀의 배움은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사랑의 표현이며, 복음을 위한 준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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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유산, 후손에게 물려주고픈 기도

“내 자녀, 손주, 후손들이 하나님의 일꾼으로 서길 바란다”는 권사님의 바람은 단지 가정의 복을 넘어서 믿음의 계보를 잇는 간절한 소망이자 기도 제목입니다. 그녀는 자녀가 어릴 적부터 매일 저녁 기도문을 손에 쥐어주고 함께 기도하게 했으며, 생일이 되면 손수 적은 편지와 함께 말씀을 나누곤 했습니다. 손주들과 함께 교회에 출석하고, 설교 후에는 함께 말씀을 나누며 적용점을 찾는 시간을 가지기도 했습니다. 권사님은 믿음이 유전되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전수되는 것이라 믿었기에 더욱 진심을 다했습니다. 심지어 손주가 어려움을 겪을 때는 직접 찾아가 손을 잡고 기도하며 “하나님은 널 절대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말을 반복했습니다. 그녀의 진심은 자녀들에게 고스란히 전해졌고, 이제는 손주들 역시 교회 사역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습니다. 권사님은 그 모습을 보며 “하나님이 내 기도에 응답하고 계신다”고 고백합니다. 그녀가 남기고 싶은 유산은 돈도, 명예도 아닌 살아 있는 신앙입니다. 후손들이 신앙의 길을 걷는 것이 권사님이 이 땅에서 감당한 사명 중 가장 소중한 열매입니다.


행암교회, 내 마지막 사명의 터전

작은 시골 마을에 위치한 행암교회는 권사님에게 단순한 예배당이 아닌, 마지막 사명을 감당할 기회의 자리입니다. 서울과 대도시의 화려함을 내려놓고 시골로 돌아왔을 때, 권사님은 이 교회를 중심으로 새로운 사역의 비전을 품게 되었습니다. 외국인 근로자, 지역 아동, 홀로 계신 어르신 등 다양한 사람들을 섬기기 위한 통로로 교회를 사용하고자 결심했습니다. 실제로 교회 내에서 아동 영어교육을 시작하고, 마을 잔치나 김장 나눔 등의 사역을 기획하며 지역 사회와 교회의 연결 고리를 만들어 왔습니다. 권사님은 이 모든 일을 감당하면서도 “나는 하나님께 부르심 받은 자”라는 정체성을 잊지 않았습니다. 매주 예배 후에는 마을 사람들과 차를 나누며 이야기를 듣고, 기도 제목을 적어 한 주간 기도하며 섬겼습니다. 그녀에게 교회는 삶의 중심이며, 하나님이 일하시는 현장이었습니다. 권사님은 “이 작은 교회가 하나님 나라의 확장 기지가 되길 바란다”며, 여전히 꿈을 꾸고 있습니다. 행암교회는 권사님의 헌신이 심겨진 곳이며, 그 뿌리는 지금도 조용히 자라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