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촌에 뿌리내린 믿음

  • 오순태 장로님
    1938년 01월 17일에 핀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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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촌을 지켜온 다섯 대의 발자취

서촌리 한복판에서 오순태 장로님은 다섯 대째 그 땅을 지켜오고 있다. “할아버지, 아버지, 나, 아들, 손주”로 이어지는 삶의 터전은 단순한 거주지를 넘어선 믿음과 공동체의 상징이다. 마을 어른들의 기억 속에서 장로님 가문은 언제나 중심에 있었다. 농사를 주 업으로 살아온 그의 집안은 농경문화의 흐름과 함께 이 지역을 지켜왔다. 예전에는 마을이 훨씬 컸고, 말(馬)을 기르던 지역이었으며, 자연의 위엄이 깃든 삶이 일상이었다. 이제는 한적해졌지만, 그는 여전히 이 땅을 떠날 생각이 없다. 이곳에서 태어나 이곳에서 신앙을 지켰고, 후손들 또한 이곳에서 살아가고 있다. 장로님에게 서촌은 단순한 주소가 아닌 인생의 뿌리이며, 믿음의 땅이다.

여섯 살 아이의 감격, 이름이 불린 그 날

여섯 살, 어린 오순태는 처음으로 교회 문을 두드렸다. 그 시절엔 바로 주일학교 등록을 하지 못하고, 일정 기간을 거쳐야만 이름을 올릴 수 있었다. ‘방청’과 ‘인도인’이라는 과정을 2년간 거쳐야만 출석부에 이름이 적히는 시스템이었다. 장로님은 당시를 회상하며 “그때만큼 기뻤던 날이 없다”고 말했다. 단순한 행정 절차가 아니었다. 그것은 어린 마음에 신앙이 깊이 새겨지는 시작이었다. 어린 오순태에게 ‘교회에 내 이름이 있다’는 사실은 무한한 자긍심이자 기쁨이었다. 지금껏 80년 넘게 신앙의 길을 걸어오며 수많은 기쁨과 눈물을 겪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결코 잊을 수 없는 신앙의 첫 장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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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촌교회, 한 마을의 복음이 시작된 자리

서촌교회는 오순태 장로님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 마을에 하나뿐인 교회”였다. 교회가 생긴 배경에는 선교사들과, 복음을 전하기 위해 사람 많은 마을을 찾은 이들의 노력이 있었다. 초기에는 여성들이 중심이 되어 모이기 시작했고, 이후에는 박찬삼, 정서진, 장신욱, 신도환 등의 초대 집사들이 등장하며 교회로서의 체계가 갖춰졌다. 오순태 장로님은 이 역사 속에 어릴 적부터 참여했고, 서촌교회의 흐름을 누구보다 꿰뚫고 있다. 단순히 신앙의 공간이 아닌, 지역 문화와 공동체의 중심지로서 서촌교회는 자리를 잡았다. 장로님은 그 교회의 산증인으로서, 믿음의 유산이 어떻게 뿌리를 내리고 꽃피웠는지 몸소 증언하고 있다.


아버지로서의 회한, “신앙이 먼저였어야 했다”

오순태 장로님은 여섯 자녀를 키우며 늘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신앙의 기준으로 자신을 되돌아보면, “일생의 대실수”를 저질렀다고 고백한다. 자녀들의 교육을 최우선으로 여기며 신앙은 뒤로 미뤘던 것이 지금까지 마음에 남는다. 그는 “신앙이 첫째요, 공부는 둘째였다”며 후회 어린 회상을 이어갔다. 실제로 자녀들에게 ‘아빠는 최고’라는 말을 듣지만, 장로님은 “신앙을 제대로 심어주지 못했다는 점에서 60점밖에 안 된다”고 말한다. 이 고백은 단지 개인의 후회가 아니다. 신앙의 중심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를 고민하는 이 시대 모든 부모에게 울림이 되는 메시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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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별의 슬픔 속에서 깨달은 사랑

아내와의 이별은 장로님 인생에서 가장 큰 고통이었다. 작년에 아내를 먼저 주님께 보내드리며 그는 진심 어린 회고를 남겼다. “부부란, 이유 없이 서로를 존경해야 한다.” 장로님은 아내의 성격이나 행동을 기준으로 평가하지 않고, 단지 ‘존경’이라는 말 하나로 정리했다. 오랜 결혼 생활을 돌아보며 그는 말했다. “사모님이 성경책을 준비했느냐, 음식을 잘하느냐보다 중요한 건 그 존재 자체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마음이다.” 이 고백은 결혼 생활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깊은 통찰이며, 사별 이후에도 남은 삶을 고요히 지탱해주는 힘이 되었다.


늙음 속의 감사, 멍청함마저 은혜였던 시간

장로님은 젊은 시절 군사고문단에 복무하며 통역병으로 활동했다. 당시 자신이 “똑똑하지 않아 감사했다”고 말한다. 지적 능력이 뛰어났다면 오히려 갈등이 생겼을 상황에서, 그는 묵묵히 순종하며 제대할 수 있었던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고백한다. “똑똑한 것이 전부가 아니다”는 말은 단순한 겸손이 아니라, 그 삶 속에서 깨달은 진리다. 또한 그는 노인의 삶에 대해 “하루하루가 다르게 늙어간다”고 솔직히 말했다. 그러나 그 변화 속에서도 감사할 수 있는 이유는 믿음이 그 삶을 지탱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젊음과 지식이 아니라 겸손과 순종으로 지켜낸 삶의 이야기는 우리 모두에게 도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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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없이 지킨 자리, 하나님이 기억하시는 삶

88세, 한 마을을 떠나지 않고 한 교회를 떠나지 않으며 살아온 오순태 장로님의 신앙 여정은 겉으로는 평범하다. 하지만 그 안을 들여다보면, 한 세대를 넘어 다섯 대에 걸쳐 이어지는 믿음의 뿌리와 그 역사 속에서 굳게 서 있었던 한 사람의 증언이 있다. 교회가 분열될 때 직접 노회를 찾아가고, 자신의 부족함을 솔직하게 고백하며, 사별의 아픔 속에서도 존경과 감사로 아내를 기억하는 그의 태도는 누구도 쉽게 흉내낼 수 없는 진심이다. 그는 대단한 사역자도, 이름난 설교자도 아니다. 그러나 한 교회를 지켜온 이 땅의 진짜 ‘장로’다. 교회 안팎에서 많은 목사와 사모, 성도들을 지켜보며 때로는 쓰디쓴 시간을 견디고, 때로는 혼자 묵묵히 교회의 무너진 틈을 메워온 존재다. 서촌교회가 여전히 살아 있는 공동체로 남아 있는 데는, 눈에 띄지 않는 이 노인의 순종과 인내가 숨어 있었다. 이제 그는 말한다. “신앙이 첫째다.” 단순하고 짧은 말이지만, 삶으로 살아낸 사람의 입에서 나올 때 그 무게는 다르다. 서촌리 한 모퉁이에서 들려온 이 오래된 신앙의 고백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깊은 울림을 남긴다. 이름 없는 곳에서도 하나님은 여전히 사람을 세우시고, 교회를 지키시며, 믿음의 역사를 써 내려가고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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