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옥녀 이등질 부부

  • 남옥녀 님
    1948년에 핀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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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등질 회장은 12대조 대에 입향한 이 마을의 토박이이고 부인 옥녀씨는 24세에 혼인하여 들어왔다. 지금까지 2남을 낳아 길렀는데 맏아들은 포항에 나가 살고 작은 아들은 부천에서 회사에 다니고 있다. 어린 시절에는 마을 앞들이 거의 삼분지 일이나 반가량이 갈밭이거나 늪이었다. 저습지가 바다보다 1.5m 높고 하단에 갑문이 없었으니 작은 해일에도 해를 입었고 봉림 앞까지는 늘 바닷물이 드나들었다. 1960년대에도 개간촉진을 위해 많은 노력을 했으나 잘 되지 않았고, 상주에서 온 사람이 저습지를 간척 해서 농사를 지으려다가 실패하기도 했다.

등질씨가 1971년에 제대하고 돌아오니 마을은 내부적으로 서로 반목하고 관청과도 분쟁이 있어서 아무 지원도 받지 못하고 있었다. 새마을지도자인 등질씨는 원연호이장과 함께 적극적으로 전기 사업을 전개하여 1974년 1월 8일 마침내 점화식을 하고 전기를 개통시켰다. 이후에 농촌경제 향상을 위해서는 농지확보가 가장 급선무라는 것을 생각하고 등질씨가 백방으로 노력하여 1974년 곡강배수개선사업이 발표되었다. 그러나 이 사업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사업비를 다른 용도로 전용하려는 시도도 있어서 매우 고생을 했다. 이 과정에서 마을 사람들도 오해를 해서 많은 고생을 하기도 했다. 등질씨는 정영규동장과 함께 군청과 농지개량조합을 설득하고 싸우다시피해서 결국 1976년부터 배수개선사업을 시작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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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에 걸친 경지정리사업 이후에 농지가 현저히 증가하고 생산력이 높아지자 마을의 소득이 크게 높아졌다. 전에 상급학교에 진학하지 못하던 청소년들이 학교에 가고 다른 마을로 팔려갔던 농지가 마을사람 소유로 회복되었다. 1980~1990년대는 소득원 다변화를 위해 노력하였다. 특히 바닷가 해풍을 맞은 시금치를 특수작물로 재배하려 연간 4개월 정도로 온 마을 전체로 매일 3백만원 이상 소득을 올리게 하였다. 이는 당시 농촌마을로서 최고의 소득이었다. 곡강시금치는 1993년 엽채식물로는 전국 최초로 품질인증을 받았고 경상북도 우수농산물 1호로 선정되었으며 독립적인 상표등록까지 이루어졌다. 이등질회장은 한국친환경농업협회장을 맡아 활도앟면서 2004년 경상북도 농정대상, 2005년에 석탑산업훈장을 받을 정도로 전국적인 농업지도자로 활약하였다.


지금 등질씨는 마을의 앞날에 대행 염려하고 있다. 마을에 젊은이가 줄어드는데, 마을이 이 위치에서 유지되지도 못할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시기가 언제가 될지는 몰라도 아마 이주를 하게 될 것이라고 한다. 그저 모든 사람이 손실 없이 차분하게 이전할 수 있기만을 바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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