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곡강마을에 언제부터 사람이 살았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가까운 칠포리에 3천년전쯤에 사람이 살았던 증거가 되는 암각화가 1990년대에 발견된 것으로 보아 청동기시대 전후에는 이미 사람이 들어와 살았을 것으로 보인다. 이때 칠포리 입구의 암각화도 함께 발견되었다. 이 지역의 청동기시대 유적으로는 위의 암각화 이외에도 남송리 지석묘가 발견되었고, 흥안리 입석도 조사되었다. 2004년에는 우회도로 건설 과정에서 남송리 유적이 발굴되었다. 당시 남송리 827번지 일대에서 주거지 38동의 유적과 토기류, 석촉과 반달돌칼 등이 발굴되었다.이로써 곡강 지역에는 청동기시대에 이미 사람이 살았으며, 그들은 유력한 부족을 이루고 토기와 신석기를 사용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기원전 2세기 경 부족국가들이 연맹체를 이루고 있을 때 곡강은 진한의 다벌국에 속해 있었다. 구체적인 위치는 알기 어려우나, 대체로 흥해 들판을 중심으로이루어진 작은 부족국가였으며, 그 가운데 일부는 미실국 혹은 남미질부국과 북미질부국이라는 각각의 이름을 쓰기도 했다. 미실국의 흔적은 현재도 남아 있는 남미질부성과 북미질부성에서 찾을 수 있다. 철기가 도입되면서 작은 부족국가들이 국가연맹체로 병합되는 흐름이 일어났다. 이때 진한의 맹주였던 경주의 사로국이 5대 파사 이사금(80~112) 대에 다벌국을 병합했다고 하였으므로, 이때부터 곡강은 신라의 일부가 되었을 것이다. 그때까지 현재의 배다릿들은 바닷물이 들어오는 호수였으며, 사람들은 호수 주위에 작은부족을 이루어 살았을 것으로 보인다.
신라시대
곡강은 남북미질부성의 관할 아래에 있었고, 소지마립간 3년(481)에 고구려와 말갈군이여기서 신라군과 전투를 벌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 밖에도 왜구의 침략으로 곡강에서 전투를벌인 기록이 있다. 이 시기에 곡강은 신라의 중요한 4대 강으로 토지하 또는참포라고 불렸고, 국가적 제례의 대상이었다. 그러므로 흥해 일대는 고구려와의 국경으로 고구려의 남진을 막는 신라 국방요지였으며,넓은 들을 가지고 있어서 왜구의 침략이 잦은 곳이어서 동해안 방어의 중요 기지이기도했다. 이에 따라 신라는 이곳에 퇴화군이라는 편제를 두고 중요한 행정구역으로 관리하였다. 현재 포항에 있는 국보 비석 2점 모두가 흥해 인근에서 출토된 것으로 봐서 이 지역은 일찍율령체제가 시행되는 조직사회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곡강 역시 이 율령체제에 편제되었을 것이며, 국가적 제례와 국방상의 필요 때문에 곡강은중요시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곡강 마을의 삶의 양식은 중요한 변화가 없이 봉림호 주위의작은 마을이었을 것이다.
고려시대
고려가 건국할 때 북미질부성의 훤달이라는 성주가 남북미질부성을 통합하여왕건에게 항복함으로써 이 지역을 흥해군이라고 불렀다. 흥해의 별칭으로 곡강 또는오산을 썼다. 당시 이 지역을 지배하던 호족은 배씨와 최씨였는데, 이들은 본관을 흥해로 쓰게 되어 흥해배씨 또는 흥해최씨로 부르지만, 다른 이름으로 곡강배씨 또는 곡강최씨라고 부르기도 한다. 실은 곡강이씨와 곡강장씨도 있다는기록이 영일읍지에 있다. 이 시대에 곡강이라는 이름이 알려지고 실제로 인구도 증가한 것으로 보이지만, 그것은 흥해 안들의 주위에 있는 언덕과 구릉에 분포한 모든 마을들을 가리키는 이름이었다. 현재의 곡강 마을 사람들의 삶은 여전히 큰 변화가 없었을 것이다.
조선시대
조선 초기까지 동해를 지키는 수군의 지휘자는 통양포수군만호였으며, 그 병영은 현재의 두호동에 있었다. 그러나 조선 세종때에 만호진기를 칠포로 옮기기로 하였다. 1425년에 통양포가 흥해에 있다는 기록이 있고, 1510년 칠포성에 만호진을 합하였다고 했다. 이때 축성한 것이 1515년 완성되었으므로 현재도 그 기록이 칠포리 성터에 남아 있다. 조선시대 내내 곡강은 흥해의 다른 이름으로 쓰였으므로, 흥해군수를 곡강군수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래서 '흥해원님' 이라는 뜻의 흥해쉬를 '곡강원님'이라는 뜻의 곡강라고 기록한 예가 많이 발견된다. 1765년 지도에서 곡강은 흥해군의 동하면에 속했으며, 1789년 인구조사서에는 동하면에 대도, 죽별, 지을, 우목구미, 소한, 구덕, 여구, 봉림, 서원, 송동, 남송, 망곡 등의 마을 이름이 열거되어 있다. 곡강은 곡강서원이 설립됨으로써 문화적으로도 알려졌다. 이 서원은 1607년 홍해의 선비 정삼외가 회재 이언적선생을 배향하기 위해 지은 서원이다. 조선 후기 서원은 지역 사림의 문화적 자존을 높이고 인재를 양성하는 중심지였다. 그런 의미에서 곡강서원이라는 이름은 곡강의 문화적 가치를 크게 고양하는 구실을 하였다. 이서원은 1868년 훼철되었고, 지금은 곡강최씨의 영모재로 복원되었다. 조선 말기에 일본이 강점해 올 때인 1906년 산남의진이 창의하여 왜적과 혈투를 벌였다. 이때 곡강지역의 의사 정순기 선생은 산남의진 소모장으로 참전하여 싸웠으며 그 묘소가 서원마을에 있다.
일제시대
조선이 망하고 일제 강점기가 되었을 때 일제는 전국의 행정구역을 개편하였다. 1913년 곡강은 흥해군 동하면에 속했다. 같은 면에 남휴, 송동, 남대, 서원, 봉림, 곡강, 여구, 흥곡, 용덕, 소한, 우목, 지을, 북별, 죽천 등의 마을이 속해 있었다. 1914년 일제는 다시 흥해군을 폐지하고 영일군으로 통합했다. 이 개편에는 특이하게도 곡강동과 곡강면이 따로 있었다. 곡강면은 곡강동은 빼고 양백에서 칠포까지를 포함했고, 곡강동은 흥해면에 속해서 너구, 흥곡, 곡강, 봉림을 포함하였다. 일제 강점기에는 이 지역 기독교인들이 항일운동의 중심 역할을 하였다. 1919년 3.1만세의거에는 청하지역의 만세활동이 두드러져서 500명이 참가하고 23명이 투옥되었다. 1928년에는 곡강청년회가 만들어져서 계몽과 교육에 진력하였다.
현대
해방 이후 1948년에 개편된 행정구역에서도 곡강동은 흥해면에 속하고 곡강면은 다른 지역을 관할하였다. 그러다가 1956년에 의창면을 설치하면서 흥해면과 곡강면을 폐지하였으므로, 곡강동은 의창면에 속해 있다가 1973년 의창면이 의창읍으로 승격하면서 의창읍 소속 곡강동이 되었다. 1983년에 의창읍을 흥해읍으로 개칭하면서 곡강은 영일군 흥해읍 곡강동이었는데,1995년에 도농통합시의 발족으로 포항시 북구 흥해읍 곡강리로 지금과 같은 이름을 가지게되었다. 곡강1리와 2리는 바다와 약간 거리가 있어서 원래 어업을 하지 않았고, 마을들 사이의들판이 모두 바닷물이 들어오는 호수였으므로 각 마을들은 원래 가난한 농촌이었다. 낮은곳에 염분이 많아서 농지정리 이전에는 봉림호 가장자리의 경사지에서만 농사를 지을 수있었다. 봉림호에는 바닷물이 드나들어 1960년대까지도 봉림과 너구 사이 저습지 가운데부분에서 농사를 짓지 못했고, 지금의 농토보다 훨씬 좁은 절반 미만의 땅에만 농사를 지을수 있었다. 게다가 봉림호 가장자리의 경사지도 습기가 많고 면적이 적어서, 인근 마을중에서 가장 빈곤한 상태였다. 그 결과 너구 마을의 농토 중에 많은 부분이 해안 마을에 사는사람에게 팔려가기도 했다. 당시에는 너구와 봉림 사이에 길도 없었고, 너구에서 흥해로 가기 위해서는 흥곡을 지나 현재의 한동대 앞으로 해서 산을 넘어야 했기 때문에, 너구 사람들은 주로 죽천을 통해 포항에 출입하였다. 도로가 없어서 교통이 매우 불편하였고 버스가 들어오지 않았으므로 흥해나 포항으로 출입할 때는 산길을 걸어서 다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