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는 처음 동네 가운데 무덤 자리에서 예배를 시작했고, 다음에는 저녁에 마을회관 자리 남의 마당에서 예배를 드렸다. 저녁마다 예배에 참석하니까 차차 교인이 늘었다. 애가 아파서 온 사람, 자식이 없어서 자식 낳고 싶어서 온 사람, 가정에 불화가 있는 사람들이 모였다. 수가 점점 늘어서 현재 곡강교회가 있던 자리에 있는 집 마당으로 예배장소가 바뀌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정식으로 교회를 지으라고 누가 136평쯤 되는 감밭을 기증했다. 그 집 며느리가 교회에 나간다고 하니 시아버지가 부자라서 그 땅을 기증했다고 한다. 그때 나무로 교회를 짓기 시작했다. 포항에서 배로 나무를 죽천에 실어 놓고 여기까지 옮겼다.
그때 전도사로 온 사람이 동네 이장에게 요청하여 마을 사람들에게 재목 운반하는 데 도와달라고 하였다. 그러자 집집마다 소 있는 사람들은 아침 식전에 한 번씩재목을 날라주고 일을 하러 갔다. 참 하나님의 역사라고 생각한다. 일부 남은 재목은죽천사람들이 저녁에 예배드리러 오면서 하나 두 개씩 짊어지고 와서 날랐다. 지붕을만들어야 하는데 미군부대 텐트천막의 천을 위에 덮었다. 바닥에는 가마니를 깔아서앉았다. 벽은 대를 엮어서 초가집 만들 듯 흙벽을 만들었다. 비가 오면 비가 새서옹기나 세숫대야를 군데군데 놓았다. 그렇게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일 년도 못되어사나운 태풍이 불어 교회 벽에 바른 흙이 다 무너져 작대기만 남았다. 할 수 없이 새로흙을 파고 이겨서 벽을 안과 밖으로 발랐다. 태풍 피해자 보조를 보태서 천막포장을걷어내고 함석으로 지붕을 이었다.
그러나 마을이 가난해서 사람들이 도시로 떠나가기 시작했다. 거의 교인이 없을지경까지 갔다가 조금 부흥하기를 반복했다. 그러다가 황영백씨가 울산에서 이사를와서 둘이 협력하니 교회를 받들기가 좀 수월해졌다. 새마을 사업이 한창일 때 새로건물을 지었다. 잘 짓는다고 블록을 사서 교회를 지었다. 여기까지 차가 못 들어오니저 한동대에서 들어오는 그 근처에 자재를 가져다 놓고 저녁마다. 수요일에 예배드리고 나서 벽돌 한 장씩 이는 사람은 이고 지는 사람은 지고 아이들 어른들 할 거없이 협력해서 지었다. 그 건물을 짓고 오래 있었다. 이후로 교회를 새로 짓는다고 계획만 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바다 안 저 멀리에 나무가 보였다. 가까이 가서 보니 길이가 한 10미터쯤 되는 나무가 떠다니고 있었다. 이 나무를 물가에 묶어두고 교인들과 군인들이 힘을 합해 끌어냈다. 그 나무를 흥해제재소에서 제재해서 교회를 지었다.
하루는 황장로님이 저기 밭이 하나 났는데 교회지을 터로 사놓자고 했다. 빚을 내서 산 그 밭이 나중에 교회를 지을 때 자본이 되었다. 1996년도에 모든 교인들이 힘을 합해 지은 교회가 지금 건물이다. 이때 김종배장로님이 힘을 많이 썼다. 그때 IMF가 터졌는데 이 근방에 이렇게 빚 없이 헌당한 교회가 없었다. 김용호장로님은 부인 때문에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 교회 안 다니면 결혼을 안한다고 했는데 단박에 교회 다니는 아가씨를 만나 한 달 만에 결혼했다. 곡강 3동 살때도 부인과 함께 곡강교회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새벽기도를 다녔다. 부인은 기도만 하면 매번 울었다고 한다. 교회 중고등학생이 40명에서 50명 되었는데 그 학생들 다밥을 먹이고 교회 행사할 때마다 밥을 다 해다 먹이고 그래서 별명이 '밥집사'였다. 부인 박인숙권사님은 결혼해서 58년 만에 세상을 버렸다. 2년만 더 살았으면 교회 60년 기념이라고 함께 좋아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