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덕조권사님

  • 임덕조 권사님
    1937년 04월 14일에 핀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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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는 집안, 믿는 마을 – 신앙이 일상이던 매정 시절

나는 경상북도 영덕군 매정이라는 마을에서 태어났어. 그 마을은 말 그대로 ‘믿음의 마을’이었지. 마을 주민들 거의 전부가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었고, 주일 아침이면 종소리만 울려도 알아서 예배당으로 발걸음을 옮겼어. 아이고, 그때는 예배 빠지는 사람 찾는 게 더 어려울 정도였으니까. 우리 집도 예외가 아니었지. 아버지는 시골 농부였지만, 믿음으로 단단하신 분이었어. 새벽이면 꼭 기도로 하루를 시작했고, 주일엔 손에 뭐 들고 나가는 일은 절대 없었어. 장을 보러 가는 것도 금기였고, 바느질 하나도 안 했어. 그만큼 주일은 거룩한 날로 여겼지. 나는 그런 분위기 속에서 자라서 그런지, 예배와 기도, 찬송이 자연스러웠고, 교회는 내 숨 쉴 곳 같았어. 지금도 생각나. 우리 어머니가 된장국 하나 끓이는 것도 토요일 밤에 다 해놓고, 주일 아침엔 그저 데우기만 했지. 그게 믿음이었고, 하나님을 향한 예의였어. 아이들 옷도 다려놓고, 새 신발 신기고, 단정하게 머리 빗겨서 교회 보내는 그 모습이 눈에 선해. 그런 집안에서 컸으니, 믿음이라는 게 따로 배운 게 아니라 그냥 몸에 밴 거야. 나는 그 시절이 너무 고맙고, 그 마을이 그리워. 사람들 다 가난했지만, 마음만큼은 넉넉했고, 어려울수록 더 기도하고 서로 도왔어. 믿음이 뿌리처럼 마을에 내려 있었던 거지. 그 믿음의 땅에서 자란 나는 지금도 그 향기를 잊지 못해. 신앙은 가르치는 게 아니라, 보여주는 거라는 걸 나는 매정 마을에서 배웠지.

굴 속 피난과 6.25 – 전쟁 속에서도 지켜진 믿음

나는 6.25 전쟁을 겪은 사람이야. 그 시절 이야기를 꺼내면 아직도 가슴이 먹먹해져. 우리 마을도 피난을 가야 했고, 그때 나는 여섯 살이었어. 나이도 어리고 기억도 흐릿하지만, 그때의 공포는 지금도 생생히 남아 있어. 당시 우리 가족은 금광굴로 피난을 갔어. 그 안은 춥고 어두웠고, 눅눅한 흙 냄새가 가득했지. 어린 마음에도 '여기가 집이 될 순 없는데' 싶은 곳이었어. 그런데도 어른들은 거기서 밥을 지어 먹고, 아이들은 울다가도 잠들었고, 기도 소리가 어둠 속을 메웠어. 무섭고 배고픈 상황에서도 하나님 이름을 부르던 그 시간이, 내 기억 속 첫 믿음의 장면이야. 어느 날은 미군 전투기가 마을 위를 돌더니 포탄을 투하했어. 마을 곳곳이 불바다가 되었고, 불에 타는 지붕을 막으려 멍석을 덮던 아버지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해. 그렇게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도 우리 가족은 하나님 붙잡았어. 기도하고 찬송하며, 이 어려움을 지나게 해달라고 매달렸지. 그 시절의 믿음은 생존이었어. 하나님 아니면 살 수 없다는 마음이, 어린 나이에도 느껴졌어. 그 속에서 기도하는 법을 배웠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이 자연스럽게 자리 잡았지. 전쟁은 고통이었지만, 동시에 믿음의 뿌리를 내리는 시간이었어. 그 어둠 속에서 배운 믿음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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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엔 무조건 교회 – 결혼 계약에 새긴 신앙의 조건

나는 결혼할 때부터 한 가지는 분명히 했어. “주일엔 무조건 교회 가야 한다.” 이게 내 조건이었지. 신랑 되는 사람이 우리 집에 인사 오기 전부터 나는 기도했어. '하나님, 믿음 없는 사람이라면 막아주십시오.' 그 정도로 나는 신앙을 인생의 가장 중요한 줄로 여겼어. 내가 신랑을 처음 봤을 땐, 뭐 믿음이 대단한 사람 같진 않았어. 조용하고, 말수도 적고. 하지만 부모님이 시키는 대로 순종 잘하고, 성실한 사람이긴 했지. 그래서 아버지가 허락하셨고, 나도 순종했어. 다만, 결혼 조건으로 ‘예배 빠지면 안 된다’고 못 박았지. 그 말에 남편도 “알겠습니다”라고 했고, 그 뒤로는 진짜 한 번도 빠지지 않았어. 결혼하고 시댁에 가서 살아보니, 집안 분위기가 내 친정이랑은 많이 달랐어. 시부모님은 교회를 다니시긴 했지만, 그렇게 열심히는 아니셨지. 하지만 내가 매주 예배 빠지지 않고 다니니까, 점점 분위기도 달라졌어. 남편도 함께 교회 다니고, 자식들도 자연스럽게 교회로 따라오게 되었지.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그 한 마디가 내 가정의 믿음 기둥을 세운 거였어. '예배는 선택이 아니라 기본이다.' 그 신앙의 기준이 내 가정을 지켜줬고, 자녀들에게도 큰 본이 되었지. 어떤 사람들은 조건 걸고 결혼하는 게 까다롭다 하지만, 나는 믿음만큼은 양보할 수 없었어. 그게 내 전부였으니까. 그리고 하나님은 그 고백을 들으시고, 지금까지 우리 가정을 지켜주셨어.


말 대신 기도로 견뎌낸 13명 시집살이

나는 결혼하자마자 대가족 속에 들어가 살게 됐어. 시부모님을 비롯해서 시누이, 시동생, 고모까지... 전부 열세 명이 함께 사는 집이었지. 요즘 젊은 사람들은 상상도 못 할 일이야. 그 안에서 며느리 노릇을 하려니 얼마나 힘들었겠어. 그런데 나는 참았지. 말로 싸우지 않고, 무릎 꿇고 기도했어. 어떤 날은 밥을 해도, 청소를 해도, 옷을 빨아도 뭐가 그리 마음에 안 드는지, 쏘아붙이고, 눈 흘기고, 들은 체도 안 하더라고. 마음이 상해서 방에 들어가 문 걸고 울 때도 많았지. 하지만 그럴수록 나는 기도했어. “하나님, 제 마음이 무너지지 않게 해주세요.” 말 한마디 안 하고 참는 게 쉽지는 않았지만, 그게 내 믿음이었어. 처음엔 다들 나를 무시했지. 어린 며느리가 뭘 하겠냐고. 하지만 내가 조용히 할 일 하고, 예배 빠지지 않고, 묵묵히 순종하는 모습을 보면서 점점 대우가 달라지더라고. 나중엔 큰일 있을 때마다 내게 물어보기도 하고, 교회 문제 생기면 나서서 도와달라 하기도 했어. 하나님께서 사람 마음을 움직이신 거지. 내가 배운 건 하나야. 말로 이기는 건 진짜 이기는 게 아니더라고. 기도로 이기면, 하나님이 함께하시니까 결과가 달라. 그 많은 식구들 틈에서 믿음 지키며 살 수 있었던 건, 말 대신 기도를 선택했기 때문이야. 지금 돌아보면, 그 시절이 내 신앙을 단단하게 만든 시간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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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히 교회를 지키며 – 대탄 갈릴리 교회의 시작

남편 직장 따라 대탄이라는 곳으로 이사를 오게 됐지. 낯선 동네,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 마음 둘 곳이 필요했어. 그때 나를 잡아준 게 바로 교회였어. 갈릴리 교회라고, 동네 사람 몇이서 모여 예배드리던 조그마한 개척교회였지. 처음엔 장소도 마땅치 않았어. 빈 건물 빌려서 예배드리고, 비 새면 양동이 받쳐놓고, 겨울엔 바람 숭숭 들어오는 데서 떨면서 찬송했어. 그래도 그 안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게 느껴졌지. 사람은 몇 안 됐지만, 예배만큼은 단단했어. 나는 그 교회가 든든히 서는 걸 보는 게 기쁨이었어. 누가 알아주진 않아도, 화장실 청소도 하고, 바닥도 닦고, 새벽마다 문 열고 나가 기도하고... 그게 내 일이었지. 목사님 안 계실 때도 예배당 불 켜고 혼자 기도하는 게 습관이 됐어. 사람들은 몰라도, 하나님은 다 아시니까.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조용한 헌신의 시간이 내 신앙을 깊게 만든 것 같아. 큰소리 한 번 안 내고, 앞에 나서지도 않았지만, 내가 있었던 그 자리에서 예배가 이어지고, 교회가 지켜졌다는 게 감사해. 내가 할 수 있었던 건 ‘조용히, 그러나 꾸준히’ 하나님 곁을 지키는 일이었어.


브로크 찍던 땅 위에 세워진 하나님의 집

지금 우리가 예배드리는 이 교회, 예전엔 브로크 찍던 자리였어. 공장 바닥에 먼지 날리고, 기계 돌아가는 소리 가득한 곳이었지. 그 자리에 예배당이 세워질 줄 누가 알았겠어. 하나님은 정말 놀라우신 분이야. 사람 눈엔 아무 의미 없는 땅이었는데, 하나님은 그 땅을 성소로 바꾸셨어. 건축을 시작할 땐 아무것도 정해진 게 없었어. 자재는 부족하고, 사람도 없고, 돈은 더더욱 없었지. 그래도 교회 세워야겠다는 마음 하나로 움직였어. 나는 그때도 조용히 내 자리 지켰지. 허드렛일도 마다 않고, 청소도 하고, 뒷정리도 하고. 교회가 자라나는 걸 옆에서 보는 게 참 기쁘더라고. 어느 날은 철근이 안 와서 공사가 멈췄고, 또 어떤 날은 비가 내려 바닥이 다 젖었지. 그래도 그럴 때마다 사람들은 기도했고, 하나님은 길을 내셨어. 나는 새벽마다 예배당에 나가 기도했어. “하나님, 이곳에 당신의 집이 세워지게 해주세요.” 그 기도가 내 하루의 시작이었어. 지금 교회에 앉아 있으면 그때 땀 흘리던 기억이 떠올라. 이 자리, 이 벽, 이 마룻바닥 하나하나에 우리의 기도와 수고가 배어 있어. 난 그게 너무 감사해. 브로크 찍던 그 자리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 그게 내겐 가장 큰 기적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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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신과 상처 속에도 믿음을 놓지 않은 이유

사람이 살다 보면 좋은 일만 있는 건 아니야. 교회 일도 마찬가지더라고. 나도 살면서 교회 안에서 참 많은 상처를 받았어. 함께 기도하던 사람이 등을 돌리고, 믿는 사람에게 배신당한 적도 있지. 처음엔 마음이 무너졌어.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나” 싶었고, 교회 문턱 넘기도 싫을 만큼 속이 상했지. 어느 날은 새벽기도 갔다가 그냥 울고만 왔어. 기도도 안 나오고, 말씀도 안 들리고, 그저 눈물만 났지. 그런데 그때 하나님께서 이런 마음을 주시더라고. “너는 사람 보러 교회 가느냐, 나 보러 오느냐.” 그 한마디에 정신이 번쩍 들었어. 내가 누구를 향해 신앙생활을 해왔는지를 돌아보게 되었지. 사람은 실망시킬 수 있어도,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는 걸 그때 다시 배웠어. 나는 사람에게 기대는 걸 내려놓고,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기로 했지. 그 후로 마음이 편해졌어. 예배당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했고, 누가 뭐래도 내 믿음은 변하지 않을 거란 확신이 들었지. 상처는 있었지만, 그걸 기도로 녹였고, 말씀으로 치유받았어. 나를 울게 했던 사람들도 이제는 미워하지 않아. 하나님이 다 아시고, 갚아주신다는 걸 믿으니까. 그래서 나는 오늘도 예배드리고, 기도하고, 찬송하는 거야. 사람이 아닌 하나님 바라보는 믿음, 그게 나를 다시 일으켜 세웠어.


90세, 지금이 가장 행복합니다

내 나이 아흔. 옛날 같으면 벌써 이 세상 떠났을 나이인데, 나는 오늘도 눈 떠서 예배드릴 수 있다는 사실이 감사해. 몸은 예전 같지 않지만, 마음은 지금이 제일 평안하고, 행복하다 느껴져. 왜냐고? 하나님을 아는 복을 누리고 있으니까. 젊었을 땐 뭐가 그리 급했는지, 일하고, 자식 키우고, 사람들 눈치 보고... 정신없이 살았지. 그러면서도 예배는 안 빠졌고, 기도는 놓지 않았어. 그 땐 그것이 사명이라 여겼고, 또 버티는 힘이었지. 근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렇게 믿음 붙잡고 산 세월이 나를 복된 사람으로 만든 거야. 요즘은 하루하루가 은혜야. 아침에 눈 뜨면 감사하고, 찬송 한 곡 부르면 기쁘고, 성경 읽다 보면 눈물이 나. 젊었을 땐 몰랐던 은혜들이, 이제야 비로소 가슴에 깊이 새겨져. 내가 살아온 길을 돌아보면, 사람보다 하나님이 나를 지키셨다는 걸 확실히 알겠어. 사람들이 “어르신, 지금 제일 바라는 게 뭐세요?” 묻는데, 나는 이렇게 대답해. “나는 지금이 제일 좋아요.” 아흔 살이지만, 믿음으로 사는 게 이렇게 기쁜 일인지, 이제야 알 것 같아. 나는 지금도 하나님 자녀고, 오늘도 예배할 수 있는 사람이니까. 이보다 더 큰 행복이 어디 있겠나. 그래서 나는 말하고 싶어. “하나님 믿고, 예배하며 살아온 인생, 참 잘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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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덕조 권사님에게 하나님이란

하나님이 어떤 분이냐고 누가 물으면, 나는 말로 다 못해. 그냥 '내 전부'라고 하면 되려나.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하나님 없이 내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을까 싶어. 나는 글도 잘 모르고, 세상 물정에도 어두웠지만, 하나님을 알고 나서부터는 길이 보였어. 하나님은 내게 아버지 같았어. 무서울 땐 품어주시고, 슬플 땐 울게 하시고, 기쁠 땐 더 크게 웃게 해주셨지. 사람은 나를 실망시킨 적이 많았지만, 하나님은 단 한 번도 나를 외면하지 않으셨어. 내가 기도하면 들으셨고, 내가 울면 안아주셨어. 나는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것도 없고, 내세울 만한 신앙도 없어. 그저 매일 예배하고, 감사하고, 순종하려고 애쓴 것뿐이야.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나를 외면하지 않으시더라고. 그게 너무 감사했지. 나는 자주 흔들렸지만, 하나님은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으셨어. 요즘은 가만히 앉아도 하나님 생각이 나. 기도하다가 웃음이 나오고, 찬송 부르다가 눈물이 나. 내 인생은 고단했지만, 하나님이 계셨기에 후회 없고 외롭지 않았어. 그래서 나는 이렇게 고백해. "하나님은 나의 가장 든든한 친구이자, 삶의 이유이십니다." 내 인생에 가장 잘한 일이 있다면, 하나님을 믿은 거야. 그분을 안 이후로, 모든 것이 달라졌거든. 그래서 나는 끝까지 하나님 붙잡고 살 거야. 그분이 계시기에 오늘도, 내일도 나는 괜찮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