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음전권사님

  • 천음전 권사님
    1955년 05월 10일에 핀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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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 안 하길 잘했지! – 내가 배운 건 믿음이었어

나는 어려서부터 공부랑은 인연이 없었어. 학교에 보내줘도 앞문으로 들어갔다가 뒷문으로 도망치기 일쑤였지. 아버지는 그런 나를 붙잡아 오느라 진땀을 흘리셨고, 결국엔 "얘는 안 되겠다" 하시고 일찍 시집보내기로 결심하셨지. 학교라고는 도합 30일 다녔을까? 이름 석 자 쓰는 것도 겨우였으니 말 다 했지. 그런 내가 지금 교회 권사로 40년 넘게 신앙생활을 했다고 하면, 사람들은 놀라. 하지만 난 가끔 생각해. "그때 공부 안 한 게 하나님 뜻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만약 공부를 했더라면, 이 길로 들어서지 않았을지도 모르거든. 내 삶엔 지식보다 믿음이 먼저 들어왔고, 그 믿음이 지금까지 나를 이끌어왔어. 어릴 땐 울진에서 살다가 부산도 가고, 영양도 거쳐 시집을 왔어. 참 유난한 길을 걸어왔지. 남들처럼 정규 교육을 받은 건 아니지만, 나는 삶으로 배웠고, 고난으로 익혔고, 하나님 앞에서 무릎 꿇으며 지혜를 배웠어. 나처럼 학교 못 다닌 사람도 하나님께 쓰임받을 수 있다는 걸, 나는 증명하고 싶었어. 지금 와서 돌아보면, 그 시절 그렇게 공부와 멀어진 것도 감사한 일이야. 하나님이 나를 따로 부르신 거니까. 난 책상 앞에 앉기보단, 예배당 바닥에 무릎 꿇는 법을 먼저 배웠고, 칠판보다 성경 말씀이 더 익숙한 삶을 살아왔지. 그게 내 길이고, 내가 받은 복이었어. 사람들은 배움이 없으면 못 한다고 하지만,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어. "믿음 하나면 충분하다." 내 인생엔 그 믿음이 있었고, 그 믿음이 나를 여기까지 데려다 줬다네.

죽어도 안 간다 했던 장로교회, 내 발로 걸어 들어가다

나는 원래 장로교회는 죽어도 안 간다 했던 사람이야. 어릴 적부터 그런 얘기를 자주 들었거든. “장로교는 찬양도 안 하고, 기도도 짧고, 냉랭하다.” 우리 집은 감리교 전통이었고, 기도하고 울고 찬양하는 그런 분위기에 익숙했지. 그런데도 지금 내가 달산교회 권사로 있는 거 보면, 참 신기한 일이지. 그때 나는 몸도 마음도 다 망가져 있었어. 밤이면 손이 저리고 다리가 떨리고, 몸이 말을 안 들었거든. 병원에서는 원인을 못 찾고, 약만 한 보따리 줬는데 나아지지 않았어. 그러던 어느 날, 달산교회가 눈에 띄었어. 이상하게도 자꾸 마음에 걸리는 거야. “한 번 가볼까?” 누가 전도한 것도 아니고, 안내한 사람도 없었는데, 내가 내 발로 교회 문을 열고 들어갔지. 그날, 예배당에 앉아있는데 기도 소리가 들리더라고. 권사님들 몇 분이서 간절하게 기도하는데, 그 소리에 눈물이 났어. "아, 이 교회가 진짜구나." 처음엔 조용하고 어색했는데, 마음은 뜨겁더라고. 그 후로 주일마다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어. 예배가 기다려졌고, 말씀도 새로웠고, 기도가 내 삶을 다시 살게 했지. 사람들한테 말 안 하고 몰래 다녔어. 시어머니 눈치도 보고, 남편 눈치도 봐야 했으니까. 하지만 점점 그 모든 걸 감수하고서라도 예배드리고 싶은 마음이 커졌어. 사람 마음은 하나님이 움직이시지 않으면 안 돼. 나는 내 힘으로 간 게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교회로 부르신 거라 믿어. 내 발로 걸어 들어간 게 아니라, 그분 손에 이끌린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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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든 몸과 무너진 마음이 이끌어낸 첫 신앙의 눈물

내가 처음 예배당에 들어간 날, 몸도 마음도 만신창이였어. 자다가 벌떡 일어나 손발이 저리고, 심장이 두근거려 잠도 제대로 못 자고, 몸이 제멋대로였지. 병원에 가도 아무 이상 없다고만 하고, 약은 자꾸 늘어나고, 마음은 더 무너졌어. 그땐 살아있으면서도 사는 게 아니었지. 그 무렵, 동네에 달산교회가 있었어. 사람들이 거기 가면 낫는다더라, 기도 많이 하는 교회라더라 소문이 났었지. 나는 속는 셈 치고 그냥 한번 가봤어. 솔직히 절박했거든. 몸이 아픈 것도 아픈 거지만, 마음이 텅 빈 것 같았어. 그렇게 예배당 문을 열고 들어갔지. 그날 들은 말씀이 지금도 기억나. 하나님은 상한 심령을 멸시치 않으신다고 하더라고. 그 말에 그냥 눈물이 줄줄 흘렀어. 누가 뭐라 한 것도 아닌데, 내 안에 있던 것들이 무너져 내리듯 쏟아졌지. 그날 이후로 난 바뀌었어. 약을 버릴 수 있었고, 두렵던 밤이 조금씩 평안으로 바뀌었지. 남편은 처음엔 반대했어. “교회 가서 뭐 하냐”고 핀잔도 주고, 갈 때마다 문 걸어 잠그기도 했지. 그래도 난 포기 안 했어. 그때 그 기도 소리, 그 찬양, 그 말씀이 내 삶의 살 길이었거든. 하나님은 그날 내 손을 잡으셨어. 교회 문을 열던 내 손이 아니라, 내 영혼을 먼저 여신 거였지. 그날의 눈물은 그냥 슬픔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첫 위로였어.


부부보다 믿음이 먼저였던 날들

내가 예수 믿기 시작하면서 가장 부딪힌 건 남편이었어. 그 사람은 한 번도 교회 문턱을 안 밟은 사람이었고, 내가 교회 나가는 걸 달가워하지 않았지. 예배 가려 하면 핀잔 주고, 문을 잠가버리기도 했어. 겨우겨우 교회 갔다 오면 문이 잠겨 있어서, 마당에 쭈그리고 앉아 울며 기도한 적도 많았지. 그래도 그걸로 흔들릴 수는 없었어. 하나님 앞에 서는 게 먼저였으니까. 그때 나는 깨달았어. 믿음은 누가 대신해 줄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남편의 눈치보다, 하나님의 얼굴을 더 보고 싶었지. 그땐 용기도 없고, 지혜도 없었지만, 기도 하나는 쉬지 않았어. 남편이 언젠간 바뀌리라 믿으며, 나 혼자 예배드리는 날이 많았지. 그 사람이 아프고 나서 조금씩 마음이 누그러졌어. 처음엔 집에서 찬송가 트는 것도 싫어하던 사람이었는데, 나중엔 조용히 듣기도 하고, 내가 기도하는 걸 말리지도 않았어. 그렇게 40년이 지났고, 결국엔 그 사람도 교회 나가게 됐어. 하나님이 하신 일이야. 믿음이란 게 참 신기해. 처음엔 다 외롭고 힘들지만, 기도하고 기다리면 언젠가는 길이 열리더라고. 난 그걸 배웠어. 부부 사이는 중요하지만, 하나님과의 사이는 더 소중해. 내가 남편을 먼저 선택했다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 거야. 믿음을 먼저 붙든 그 결정이, 내 인생을 바꿔놓은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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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들, 수렁에서 건져낸 기도의 역사

내가 평생 잊을 수 없는 기도 제목이 있다면, 그건 바로 우리 아들이야. 그 아이가 어릴 땐 별 탈 없이 자랐는데, 어느 순간부터 마음이 무너졌는지 말이 없어지고, 방 안에만 틀어박혀 있더라고. 처음엔 사춘기인 줄 알았지. 그런데 날이 갈수록 말도 없고, 밥도 잘 안 먹고, 웃는 얼굴을 볼 수가 없었어. 그러다 어느 날, 아이가 유서를 썼다는 걸 알게 됐어. '엄마 미안해요' 그 글씨를 보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어. 그날 이후로 나는 새벽마다 교회 나가 기도했지. 찬송 한 곡 부르고, 강단 앞에 엎드려서 울고불고 기도했어. 사람들 눈치도 안 보였어. 살려달라고, 제발 하나님께서 다시 일으켜달라고 매달렸지. 그렇게 몇 달을 기도하던 어느 날, 아이가 내게 말하더라. "엄마, 나 다시 시작해볼래." 그 한마디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어. 그리고 정말로 그 아이가 다시 일어났어. 지금은 자기 삶도 잘 꾸려가고, 교회도 다니고, 기도도 해. 난 그 모습을 볼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해. 내가 한 건 아무것도 없어. 그냥 기도했을 뿐인데, 하나님이 다 하신 거지. 내가 확실히 믿는 게 있어. 자식은 부모가 살리는 게 아니야. 하나님이 살리셔. 그리고 그 통로가 기도야. 그날 이후로 나는 어떤 문제든 기도부터 해. 눈물로 심은 씨앗은, 반드시 열매로 돌아온다는 걸 나는 그 아이를 통해 배웠어.


제사냐 신앙이냐, 나는 믿음을 택했지

시집살이하면서 제일 힘들었던 게 제사 문제였어. 시어머니는 유난히 제사를 중요하게 여기셨거든. 난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 제사상 앞에 절을 할 수 없었지. 처음엔 몰래 빠지기도 하고, 일부러 아픈 척하기도 했어. 근데 결국은 마주칠 날이 오더라고. 그날도 제사 준비를 다 해놓고 있었는데, 시어머니가 부르시더라고. 절하라고. 나는 조용히 말씀드렸어. "어머니, 저는 하나님 믿는 사람이에요. 절은 못 합니다." 그 말에 어머니가 화를 내시고, 나를 향해 소리치셨지. 순간 마음이 무너졌지만, 그래도 물러설 수는 없었어. 내 믿음을 지키는 일이었으니까. 그 후로도 많은 갈등이 있었어. 남편도 중간에서 끼어서 힘들었을 거야.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내가 제사 때마다 조용히 방에 들어가 기도하면, 그 시간이 지나면 마음이 편해지더라고. 하나님께서 지켜주신다는 평안이 있었어. 어느 해부터는 시어머니도 더 이상 강요하지 않으셨어. 그때 알았지. 사람의 마음도 하나님이 움직이시는 거라는 걸. 신앙을 지키는 건 늘 쉬운 일이 아니야. 가까운 가족 사이에서일수록 더 어려워. 하지만 그럴수록 내가 더 무릎 꿇었고, 그 자리를 하나님께 내어드렸지. 제사냐 신앙이냐 물었을 때, 나는 단호히 말했어. "나는 하나님 편입니다." 지금도 그 선택에 후회는 없어. 하나님은 그때마다 내 편이 되어주셨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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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과 약보다 컸던 찬양 한 곡의 위로

몸도 마음도 지칠 대로 지쳤을 때, 사람들은 병원부터 찾으라고 하더라고. 그래서 정신과에도 몇 번 가봤어. 약도 받아왔지. 근데 그 약이 나를 살리진 못했어. 잠은 조금 올지 몰라도, 마음속 허전함은 점점 더 커졌거든. 하루하루가 너무 힘들고, 사는 이유도 모르겠고, 그냥 다 내려놓고 싶다는 생각뿐이었어. 그런 날 중 하나였어. 달산교회 예배당에 앉아 있었지. 아무 말도 안 나오고, 기도도 안 됐어. 그때 누군가 찬송가 하나를 틀었는데, '내 평생에 가는 길'이라는 곡이었어. 그 찬양이 흐르는데, 이상하게 눈물이 났어. 가사가 가슴을 파고들었지. “내 평생에 가는 길 순탄하여 늘 잔잔한 강 같든지… 내 영혼 평안해.” 그 한 구절이 내 영혼을 감쌌어. 약으로도, 사람 말로도 안 되던 게 찬양 한 곡에 무너졌지. 그날 이후로 나는 찬양의 힘을 믿게 됐어. 마음이 너무 힘들 때면 찬양부터 틀었어. 약봉지보다 찬양 한 곡이 나를 더 살렸지. 하나님은 찬양 가운데 역사하신다는 걸 몸으로 느꼈어. 지금도 몸이 안 좋고, 기력이 없을 때면 그 찬송부터 불러. 예배당에 못 나갈 때도, 누워서라도 흥얼거리면 마음이 달라져. 찬양은 나한테 약이고, 기도고, 하나님 만나는 길이야. 사람들은 음악이라 하지만, 내겐 생명이었어. 그 노래 덕분에 나는 지금도 살아 있는 거야.


내가 받은 가장 큰 복은, 예수님을 알게 된 것

내가 이 나이가 되도록 살아오면서, 많은 걸 겪었어. 가난도, 병도, 오해도, 외로움도… 다 겪었지. 그런데 그 모든 세월을 돌아보면, 내가 받은 가장 큰 복은 딱 하나야. 예수님을 알게 된 거. 다른 복은 없어도 괜찮아. 그분을 안 이후로 내 인생은 달라졌으니까. 처음엔 교회 문턱도 안 넘던 사람이었어. 찬송은커녕, 기도 소리만 나도 마음이 불편했지. 그런데 내가 병들고 지쳐서 아무 데도 갈 수 없었을 때, 마지막으로 남은 길이 바로 예수님이셨어. 그때 내 마음에 빛이 하나 들어왔지. 세상 누구도 줄 수 없는 위로였고, 말로 설명할 수 없는 평안이었어.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서 인생이 쉬워진 건 아니야. 여전히 가난했고, 병도 있었고, 눈물 흘릴 일도 많았지. 근데 그 속에서 항상 함께 계셨던 분이 있었어. 힘든 일보다 더 크신 분, 눈물보다 더 깊은 사랑으로 나를 안아주신 분. 그게 예수님이었어. 사람들은 성공을 복이라 말하지만, 나는 예수님을 만난 걸 가장 큰 복이라 말해. 그분 없었으면 벌써 내 생은 끝이 났을지도 몰라. 예배당 한 귀퉁이에 앉아 찬양을 흥얼거리며 기도할 수 있는 이 순간이, 나에겐 기적이고 은혜야. 지금도 누가 내게 물으면 그렇게 말해. “나는 복 받은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알게 됐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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