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호집사님

  • 박성호 집사님
    1900년 01월 01일에 핀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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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는 많았지만, 나만 살아남은 어린 시절

나는 1936년 낙평에서 태어났어요. 우리 부모는 자식이 많았지요. 나 포함해서 열 명이나 되었는데, 지금 살아 있는 사람은 나 하나뿐이에요. 그땐 약도 없고 병원도 멀어서 아이들이 태어나도 오래 못 사는 경우가 많았어요. 나도 어릴 적에 심하게 아팠던 적이 있는데, 살아남은 게 기적이라니까요. 그 시절은 참 가난했어요. 먹을 것도 부족했고, 입을 옷도 늘 모자랐지요. 흙바닥에서 맨발로 뛰놀았고, 하루 두 끼도 제대로 못 챙겨 먹을 때가 많았어요. 그래도 마을 사람들끼리는 서로 도우며 살았고, 그 안에서 웃음도 있었어요. 어려운 가운데서도 부모님은 부지런하고 성실했어요. 덕분에 나도 일찍 철이 들었지요. 나는 어릴 때부터 일하는 걸 배웠어요. 들에 나가 김을 매고, 물 길러 다니고, 겨울엔 장작 패고… 어린 나이에 어른들이 하는 일을 따라 했어요. 그게 자연스럽게 몸에 익었지요. 지금 생각하면 힘들었지만, 그때 배운 성실함이 지금까지도 남아 있는 것 같아요. 형제들은 다 먼저 떠났지만, 나는 지금도 그 아이들 얼굴이 기억나요. 같이 뛰놀던 동생들, 병석에 누워 있던 누이… 가끔 그들을 떠올리면 마음이 뭉클해요. 살아남았다는 게 감사하면서도, 그만큼 잘 살아야겠다는 마음이 늘 있었어요. 그래서 지금도 하루하루 성실히 살려고 해요. 살아 있다는 게 감사한 일이니까요.

형수 밑에서 자라며 배운 노동과 책임감

나는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신 후, 형 집에서 자랐어요. 형수 밑에서 살림도 거들고, 바깥일도 도왔지요. 형수는 말씀이 많지는 않았지만 부지런하셨고, 그 밑에서 나는 일찍부터 어른처럼 살아야 했어요. 남들보다 책임을 일찍 알았고, 손발이 빠른 사람이 되어야 했지요. 형 집에서 지낸다는 건, 눈치도 봐야 하고 실수하면 안 된다는 긴장 속에 사는 일이었어요. 내 집이 아니니까 더 조심스러웠고, 매일 아침 누구보다 먼저 일어나 일을 도왔어요. 마당 쓸고 물 긷고, 밭에 나가 김 매고… 그게 당연했어요. 그래도 형수는 나를 괄시하지 않았어요. 오히려 네가 착하고 성실해서 살림에 도움 된다고 칭찬도 해줬지요. 그 말이 내겐 큰 힘이 됐어요. 그 시절을 지나며 나는 ‘책임’이라는 단어를 몸으로 배웠어요. 내 몫을 해내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걸. 지금도 그 시절을 떠올리면 마음이 숙연해져요. 부모 없이 자란다는 건 쉽지 않았지만, 그만큼 일찍 인생을 배웠다고 생각해요. 형수 밑에서 보낸 시간은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지만, 동시에 나를 가장 단단하게 만든 시절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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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평 목재소에서 시작된 일꾼 인생

나는 열다섯 살 무렵부터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했어요. 그중 가장 오래 다닌 곳이 바로 낙평 목재소였지요. 아침부터 톱 소리, 망치 소리 울리는 곳에서 하루 종일 땀 흘리며 나무를 날랐고, 톱밥 속에서 밥 먹으며 살았어요.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시절이었지만, 그때 배운 성실함은 지금도 제 몸에 남아 있어요. 목재소 일은 육체적으로도 고됐지만, 정신적으로도 단단해지는 시간이었어요. 무거운 목재를 혼자 들고 나를 때면 허리가 끊어질 것 같았지만, 아무도 대신해 주지 않으니까 내가 버텨야 했어요. 일을 게을리하면 다음날 나올 수 없었고, 그만큼 책임감도 무거웠지요. 그래도 일터엔 사람이 있었고, 땀 흘려 버는 돈의 값어치를 알게 해준 곳이었어요. 그곳에서 나이 많은 형님들, 동갑내기 친구들, 다 같이 땀 흘리며 일하고, 짬 나면 막걸리 한 사발 나눠 마시며 위로하던 그때가 참 정겨웠어요. 나는 그곳에서 '일꾼'이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생각해요. 몸이 고되도 입은 무겁고 손은 빠른 사람, 그게 내 별명이었어요. 목재소는 내 청춘이었고, 성실함이 내 자랑이던 시절이었어요. 지금도 누가 물으면 그래요. "나는 일하면서 살았고, 일로 하나님께 영광 돌렸습니다."


20살 결혼, 믿음의 처녀 김순옥과 함께한 삶의 시작

나는 스무 살에 결혼했어요. 그때만 해도 연애 같은 건 없었고, 어른들이 정해주신 대로 순종했지요. 그런데 참 감사한 건, 내 아내 김순옥은 믿음의 처녀였고, 지금까지도 한결같은 사람이라는 거예요. 첫인상도 참 단정하고 조용했어요. 뭐든지 믿음으로 풀어가려는 사람이었어요. 우리 결혼식은 소박했어요. 동네 어른들 몇 분 모셔놓고, 집 앞 마당에서 상 차려놓고 인사드리는 것으로 끝났지요. 그래도 마음만큼은 든든했어요. 이 사람이라면 같이 고생해도 후회 없겠구나 싶었어요. 실제로 결혼 후 삶은 녹록지 않았어요. 형편은 늘 빠듯했고, 자식은 연년생으로 줄줄이 태어났어요. 그래도 아내는 단 한 번도 원망하거나 불평한 적이 없어요. 자식들 기저귀 빨고 밥 지어 먹이면서도 늘 감사하다는 말을 했어요. 특히 신앙에 있어서는 늘 앞장섰지요. 새벽예배, 주일예배, 어떤 일이 있어도 빠지지 않았고, 나까지 손 잡아끌며 교회로 이끌었어요. 지금 돌이켜보면, 그 시절 아내의 믿음이 우리 가정을 지켰다고 생각해요. 나보다도 하나님을 먼저 사랑한 그 마음 덕분에, 나도 조금씩 교회에 발을 들이게 되었고, 지금 이렇게 신앙을 고백할 수 있게 되었지요. 내 인생에서 가장 큰 복이 무엇이냐 물으면, 나는 망설임 없이 말해요. "내 아내를 만난 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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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병대 복무와 전우들과의 기억

나는 스물한 살에 해병대에 입대했어요. 나라에서 부르면 가야 하는 줄 알고 묵묵히 따라갔지요. 그 시절 해병대 훈련은 정말 혹독했어요. 바다에 뛰어들고, 땅을 기고, 산을 오르내리며 진짜 사나이가 되는 법을 배웠어요. 힘들었지만, 거기서 내 몸과 마음이 더 단단해졌어요. 전우들과 함께 고생했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해요. 텐트 속에서 빗소리 들으며 몸을 웅크렸던 밤, 훈련 끝나고 함께 나눠 먹던 건빵 하나가 그렇게 꿀맛이었어요. 군복 입은 채 서로의 등을 토닥이며 의지했던 그 시간들은 내 청춘의 한 조각이 되었지요. 복무 기간 동안 나는 '버틴다'는 것이 어떤 뜻인지 배웠어요. 힘들다고 도망가지 않고, 아프다고 쉬지 않고, 맡은 일을 끝까지 해내는 것. 그게 해병대가 내게 가르쳐준 정신이었어요. 그때 체득한 인내와 책임감은 제대 후 삶에서도 큰 밑거름이 되었어요. 지금도 군대 이야기를 하면 마음이 짠해요. 해병대는 내게 단순히 군복무가 아니라, 사람으로서 더 강해지게 해준 인생 학교였어요. 나는 해병대 출신이라는 걸 자랑스럽게 생각해요. 그 시절 땀과 눈물 속에, 지금의 나를 빚어낸 하나님도 함께 계셨던 것 같아요.


맨손으로 시작한 도시 생활과 고생담

제대하고 나서 도시에 올라가 일자리를 구했어요. 돈 한 푼 없이 시작한 도시 생활은 말 그대로 바닥에서부터였지요. 공사장 막일부터 시작했어요. 시멘트 자루 나르고, 벽돌 쌓고, 먼지 속에서 하루를 보냈어요.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숙소는 컨테이너나 쪽방이었어요. 그래도 포기하진 않았어요. 그땐 하루 일당이 몇 천 원밖에 안 됐지만, 손에 쥐고 나오면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었어요. 일 마치고 씻지도 못한 채 구내식당에서 밥 한 공기 비우면 그게 최고였지요. 옷에 먼지와 땀이 밴 날들이었지만, ‘내가 번 돈으로 산다’는 자존심이 있었어요. 가족이 생기고 아이들이 태어나면서 더 열심히 살았어요. 신발공장, 인테리어, 미장, 택배… 닥치는 대로 했어요. 일이 고되고, 때로는 속상한 일도 많았지만, 나는 물러서지 않았어요. 가정을 지킨다는 마음 하나로 버텼어요. 그 시절이 있었기에 지금이 있는 거예요. 내가 고생한 만큼 가족은 굶지 않았고, 아이들은 공부할 수 있었어요. 돌아보면 하나님이 지켜주셨기에 가능했던 삶이었지요. 나는 가진 건 없었지만, 성실하게 살았고, 부끄럽지 않게 살았다고 말할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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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낙평으로 돌아와 농사짓고 자녀 키운 세월

도시에서 오랜 시간 고생하다가, 결국 다시 낙평으로 내려왔어요. 고향 땅은 낯설면서도 편했고, 무엇보다 마음이 놓였어요. 빈 논밭을 다시 일구고, 작은 집을 고쳐가며 농사를 시작했지요. 처음엔 농기계도 없고, 손으로 흙을 만지며 땀 흘리는 일이 버거웠지만, 그래도 내 땅 밟고 산다는 게 참 좋았어요. 논농사며 고추며 참깨며 안 해본 게 없었어요. 해 뜨면 밭에 나가고, 해 지면 집으로 돌아와 아이들 챙기고… 그렇게 하루하루가 빠듯했지요. 자식들 학교 보낼 땐 책가방 메고 같이 걸어가기도 했고, 새 학기 앞두곤 옷 한 벌 사주려 장터까지 다녀오기도 했어요. 형편은 늘 빠듯했지만, 자식들 공부시키는 데는 아끼지 않았어요. 아내도 고생이 많았어요. 밥 짓고 밭일하고, 때로는 나보다 더 부지런히 움직였지요. 덕분에 우리는 단단한 집을 이루었고, 자식들도 모두 반듯하게 자라줬어요. 그게 지금 생각해보면 제일 큰 복이에요. 낙평으로 돌아와 땅을 일구고, 자식 키우고, 신앙을 조금씩 이어가며 살았던 그 시절. 힘은 들었지만, 그만큼 감사도 많았던 시간이었어요. 지금도 들판을 보면 그때 밟았던 흙냄새가 떠오르고, 그 안에 하나님의 손길이 함께했음을 느껴요.


믿음은 약하지만, 교회는 좋아요 – 나의 신앙 고백

나는 말주변도 없고, 성경도 깊이 아는 건 없어요. 그래서 내 믿음은 남들처럼 크다 말할 수는 없어요. 그래도 교회는 좋았어요. 사람도 좋고, 예배드리면 마음이 참 편해졌어요. 처음엔 아내 따라 교회에 발을 들였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내가 먼저 문을 열고 들어서게 되더라고요. 설교는 다 이해 못해도 좋았어요. 찬송가 부르면 괜히 눈물이 나고, 말씀 한 줄이라도 마음에 들어오면 그걸로 힘이 났어요. 젊었을 땐 바쁘다는 핑계로 빠질 때도 있었지만, 이제는 교회 오는 게 제일 큰 기쁨이에요. 나 같은 사람도 교회에 앉아 있을 수 있다는 게 감사해요. 예배 끝나고 목사님 설교 좋았다고 한마디 건네면, 마음이 따뜻해져요. 교회가 내게는 쉼터이고, 하나님 앞에 나를 내려놓는 자리예요. 지금도 매일 완벽하진 않지만, 마음속으론 늘 하나님 생각하며 살아요. 기도는 짧게라도 해요. "하나님, 오늘 하루도 잘 넘기게 해주세요." 그 짧은 기도 하나로 하루를 시작해요. 믿음이 약해도 괜찮다고, 하나님은 내 진심을 아신다고 믿어요. 그래서 지금도, 교회 문이 열려 있으면 나는 그 안에 있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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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손들에게 남기는 인생 조언과 마지막 인사

나는 많이 배우지도 못했고, 가진 것도 많지 않지만, 한 가지는 자부심 있게 말할 수 있어요. 평생을 정직하게, 성실하게 살았다는 거예요. 그리고 지금 이 나이가 되어 돌아보면, 결국 남는 건 사람이고, 믿음이고, 가족이에요. 자식들, 손주들, 이 글을 읽는 모든 젊은 사람들에게 말해주고 싶어요. 세상은 요란하게 돌아가지만, 마음은 조용히 가야 해요. 남 따라가지 말고, 내가 옳다고 믿는 길을 뚜벅뚜벅 걸어가길 바라요. 어려워도 포기하지 말고, 힘들어도 버티다 보면 길이 열리는 게 인생이에요. 특별한 말은 없지만, 이렇게 말하고 싶어요. “고맙다.” 나와 함께해 준 사람들, 나를 믿고 따라준 가족들, 그리고 언제나 내 곁에 계셨던 하나님께. 내 인생이 짧진 않았지만, 참 감사한 삶이었어요. 지금도 건강하진 않지만, 하루하루를 감사하며 살아가고 있어요. 혹시 내 인생에서 배울 게 있다면, 그것은 ‘성실’과 ‘감사’예요. 바람 불어도 뿌리 내리고, 비 와도 꺾이지 않으며, 주어진 삶에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왔어요. 그게 내 전부이고, 자랑이에요. 나는 이제 그 삶을 마무리하며, 조용히 말하고 싶어요. "나는 참 복된 인생을 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