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걸음, 끝까지 이어진 믿음의 길

  • 윤명순 권사님
    1952년 09월 10일에 핀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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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명순 권사, 기적의 포도밭을 일군 믿음의 여정

"75세의 나이에도 에너지가 넘치는" 윤명순 권사님. 천안 병천면 매성리라는 깊은 시골 마을, 유관순 열사의 숨결이 닿는 곳에서 시작된 그녀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 한 편의 드라마였습니다. 그녀의 삶은 개인의 신앙을 넘어, 한 교회가 세워지고 부흥하는 과정의 산증인이자,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가 어떻게 개인의 삶을 통해 역사하는지를 보여주는 감동적인 간증입니다.

무당 할아버지의 영향, 친정 어머니의 변화

매성리의 깊은 시골에서 태어나고 자란 윤명순 권사님. 어릴 적 그녀의 부모님은 신앙생활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특히 그녀의 어머니는 외할아버지가 무당이었던 영향 때문인지, 남의 점을 봐주지는 않았지만 나라 돌아가는 일까지 꿰뚫어보는 듯한 소리를 자주 하셨다고 합니다. 방 안에는 굿을 할 때처럼 빨간 천이 붙어 있었고, 어릴 적 권사님은 그 장면을 또렷이 기억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는 지금 목사가 된 오빠에게 "동쪽에서 여자 둘과 남자 하나가 오면 집안이 망하니 절대 들이지 말라"는 섬뜩한 경고를 합니다. 하지만 다음 날 해 질 녘, 교회를 다니던 이모님 두 분과 이종 오빠가 정말로 그 집을 찾아왔습니다. 오빠가 이모님들을 만류했지만, 이모님들은 단호하게 "마귀가 하는 짓을 순종하지 말고 사탄을 이겨야 한다"며 집으로 들어서셨습니다. 이모들이 집에 발을 들이자마자, 놀랍게도 어머니는 "죽어 나자빠지듯이" 싫어하는 격렬한 반응을 보였다고 권사님은 회상합니다. 마치 기도하는 자가 오자 마귀가 넘어지는 것 같았다고 말입니다. 한참 후, 정신을 차린 어머니는 이전의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동생들을 너무나 반가워했습니다. 이모님들은 이때를 놓치지 않고 아버지를 설득해 예수님을 믿기로 합니다. 차가 없던 시절, 장정들이 팔다리를 붙들고 강제로 끌고 가다시피 해서 도착한 곳은 병천교회였습니다. 그곳에서 보름간의 철야 기도를 통해 어머니 몸속에 있던 악한 기운이 내쫓아지고, 그 후 어머니는 병천교회까지 십 리나 되는 거리를 날마다 오가며 새벽 기도까지 나가는 열정적인 신앙인으로 거듭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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밭에 꽂힌 십자가, 매성교회의 탄생

어머니의 불꽃 같은 신앙은 곧 온 집안으로 퍼져나갔습니다. 안방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고, 주의 종을 보내주셔서 우리집에 거주하며 매성교회 개척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교인 수가 늘어나자 안방은 물론, 아래 옷방까지 확장하고, 나중에는 굴뚝 옆에 4칸짜리 건물을 달아내 교회를 확장했습니다. 김선예 전도사님은 심지어 그곳에서 주무시며 목회를 이어갔습니다. 매성교회는 그렇게 집의 일부에서 점차 독립된 형태를 갖춰갔습니다. 어느 부흥집회 때였습니다. 강사 목사님이 기도하시더니 권사님의 아버지께 "여기 성전 건축할 자리가 있다. 하나님이 보여주셨다"고 말했습니다. 아버지가 가보니 놀랍게도 그곳은 권사님 아버지의 밭이었고, 그 밭에 십자가가 꽂혔더랍니다. 이에 아버지는 흔쾌히 자신의 밭 200평을 하나님께 드렸고, 그곳에 매성교회가 건축되었습니다. 국민학교를 겨우 졸업한 어린 나이였음에도 권사님은 이 모든 기적 같은 광경을 생생히 기억합니다. 그녀는 훗날 이 매성교회에서 결혼식까지 올리게 됩니다.


믿음의 가정을 일구다

매성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이어가던 윤명순 권사님은 중매로 지금의 남편을 만나 행암리로 시집을 오게 됩니다. 스무 살, 1971년이었습니다. 결혼 전 시어머니와의 첫 만남에서 그녀는 단 하나의 조건을 내걸었습니다. "나는 다른 거 아니고 교회만 다니게 하면 허락한다." 시어머니는 "너희들끼리 살 건데 믿든지 말든지 내가 무슨 상관이냐"며 허락했고, 그렇게 권사님은 믿지 않는 이들로 가득한 마을, 심지어 매년 산신제를 지내는 당집까지 있는 곳으로 시집을 왔습니다. 권사님은 믿지 않는 시댁에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많은 어려움을 겪으셨지만, 시어머니께는 최선을 다해 효도하셨다고 합니다. 권사님은 저녁마다 교회에 와서 울며 기도했는데, 그 기도의 내용은 "하나님, 제가 보이는 시어머니도 공경하지 못하는데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어떻게 섬기겠습니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매일 저녁 부모님을 공경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며, 예수 믿는 자로서 이 마을에서 본이 되기 위해 부모님을 잘 섬길 수 있게 해달라고 간구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권사님은 이러한 기도를 통해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면서도 남들에게 덕이 되고, 예수님 때문에 억울하고 슬픈 일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최선을 다했다고 언급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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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직전 아들의 치유, 온 가족을 변화시킨 기적

행암리에 시집온 초기, 교회는 없었지만 동면교회에 다니며 신앙생활을 이어갔습니다. 그러다 시어머니 때문에 잠시 신앙이 중단된 시기가 있었습니다. 그때 권사님의 큰아들(현재 54세)이 어린 시절, 옛날 바가지 샘에 빠져 목숨이 위태로워졌습니다. 병원에서도 이유를 모르겠다고 손을 놓았습니다.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어떤 이가 시어머니께 "손자를 살리려면 굿을 하든지 예수를 믿든지 해야 한다"고 조언했습니다. 그러자 시어머니는 권사님에게 "예수당에 가서 애만 살려와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에 권사님은 너무나 기뻐 부엌에 밥상을 놓고 춤을 추었다고 회상합니다. 설거지도 잊고 아이를 업고 동면교회로 막 뛰었습니다. 그런데 교회만 가면 아이가 멀쩡하게 잘 놀았지만, 집에만 오면 새파랗게 죽어가는 것이었습니다. 권사님은 "우리 집이 악령의 세력이 센 곳"이라고 느꼈습니다. 목사님은 권사님에게 "약을 다 끊고 기도로 밀고 나가야 애가 산다"며 "약 의존, 하나님 의존 반반 하면 안 된다"고 단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권사님은 그 자리에서 모든 약을 버리고 오직 기도로만 매달렸습니다. 그 결과, 죽어가던 큰아들은 완벽히 치유되어 지금도 건강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젊은 전도사님의 꿈, 행암교회 개척의 시작

큰아들의 치유 후, 권사님은 동명교회를 다니면서도 몇몇 교인들과 저녁마다 모여 예배드리고 기도했습니다. "마귀에게 지지 않게 해달라, 행암리에 하나님이 함께 해달라"고 열정적으로 기도했지요. 그러던 1975년쯤, 이영화 전도사님이라는 분이 권사님을 찾아왔습니다. 전도사님은 권사님을 보더니 무릎을 치며 말했습니다. "어젯밤 꿈에 산기슭을 내려오는데 포도밭이 엄청 크고 포도가 주렁주렁 열려있더라. 그 포도나무 옆에 노인 몇 명과 여자가 가운데 서서 예배드리고 있었는데, 그 여자가 딱 당신 모습이었다"고. 20대 초반의 젊은 전도사님은 천안에서 이곳까지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행암교회 개척을 시작했습니다. 교회 건축을 위한 돈은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또 다른 방법으로 길을 여셨습니다. 동명교회를 함께 다니던 주수근 씨라는 성도님이 선뜻 자신의 땅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땅은 생겼지만 건물은 누가 지을까요? 여자들이 직접 흙벽돌을 찍고, 나무를 베어 서까래를 끌고 와서 교회를 지었습니다. 심지어 둘째 딸을 임신 중이던 권사님은 배가 불렀는데도 그 힘든 일을 상처 하나 없이 해냈다고 합니다. 흙벽돌을 찍어 놓으면 비가 오는 등 여러 어려움이 있었지만, 교회를 짓는다는 자체만으로 "너무 좋고 재밌었다"고 권사님은 당시의 기쁨을 전합니다. 교회가 완성되었을 때의 기쁨은 "춤을 춰도 모자랄 만큼" 컸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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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들에게 비친 믿음의 유산

윤명순 권사님은 행암교회 주일학교 교사도 맡았습니다. 심지어 모내기 중에 주일학교 아이들이 기다릴까 봐 논일을 팽개치고 뛰어갔을 정도로 열심이었습니다. 놀랍게도 이 행암교회 주일학교 출신 중에는 선교사, 목사님, 사모님들이 많이 배출되었습니다. 그녀의 삶에서 가장 큰 간증 중 하나는 "하나님께서 자녀들의 짝을 잘 채워주신 것"이라고 말합니다. 4남매가 모두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는데, 특히 첫째 아들 내외와는 매주 한 번씩 성경 5장씩 읽고 대화하며 며느리가 말씀을 해석해주는 깊은 교제를 나눈다고 합니다. 작은 며느리의 친정 부모님 역시 예수님을 잘 믿는 믿음의 가정이며, 막내아들 집은 장모님과 사위가 교회에서 함께 교인들을 안내하는 모습을 보고 "이보다 더 큰 축복이 어디 있나" 싶었다고 전합니다. 자녀들을 키울 때 그녀는 단 한 번도 매질하거나 욕한 적이 없습니다. 대신 "엄마 좀 도와주면 안 될까?" 하고 정중하게 부탁하면 아이들이 스스로 도와주었다고 합니다. 이 마을을 떠나 천안으로 가서 부유하게 살 수 있는 기회도 여러 번 있었지만, 권사님은 "행암교회가 문 닫을까 두려워" 하나님께 기도하며 결국 이곳에 남기로 결정했습니다. 남편은 아직도 그때 부자가 될 기회를 놓쳤다며 아쉬워하지만, 권사님은 "하나님이 눈에 보이는 돈보다 자녀들에게 사랑의 축복을 주신 것"이라며 오히려 감사한다고 말합니다


믿음의 여정, 깨달음과 후배들을 위한 조언

윤명순 권사님의 요즘 기도 제목은 "건강하게 예수 잘 믿다 천국 가는 것"입니다. 올해 들어 그녀가 크게 깨달은 것은, 친정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 시골 마을로 시집온 것, 어린 나이에 "마귀를 이겨야 한다"며 노인들과 함께 예배를 인도했던 것, 그리고 이영화 전도사님을 만나 교회를 개척한 것 이 모든 것이 행암교회를 세우려는 하나님의 뜻과 섭리였다는 사실입니다. 5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이 교회를 지켜왔으니, 권사님의 인생에서 교회가 빠질 수 없는 이유입니다. 젊은 신앙 후배들에게 그녀는 진심 어린 조언을 건넵니다. "말씀을 많이 보라"는 것입니다. 젊었을 때 말씀을 많이 보지 못한 것이 지금은 후회된다며, 말씀이 첫째이고, 말씀을 봐야 스스로 기도하게 된다고 강조합니다. 권사님에게 하나님은 평생을 함께하신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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