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자 씨

  • 김성자 님
    1949년에 핀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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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광면에서 태어나 동해면으로 시집을 가서 살다가 여기로 왔다. 친정이 큰집이라 매일 고기반찬을 하고 손님도 많이 와서 좋았는데 커서 보니 매일 상 차리고 제사지내느라 친구들과 놀 시간도 없어 힘들었다. 물도 멀리서 이어와야 했는데 물 길어 밥하고 설거지하느라 고생했다. 그 때문에 성자씨는 부잣집이나 맏이에게는 절대로 시집을 안 가겠다며 당시에 좋은 사람들 중신 들어온 걸 마다하고 이 집에 시집을 왔다. 처녀때부터 오빠를 따라 교회에 다녔는데 당시 다니던 교회의 목사님이 중신을 해주었다. 남편은 9남매 중 둘째였는데 시어머니가 소아마비로 몸 한쪽을 잘 못 쓰는 분이었다. 시어머니가 장가간 큰형님이랑 살겠다고 했는데 큰형님네 부부가 시어머니를 모시지않겠다고 하여 성자씨가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다. 시어머니를 모시면서 시동생과 시누이를 돌보고 학교를 보내고 시집 장가를 다 보냈다.

시어머니는 교회를 다녔는데 남편은 교회를 안 다녔다. 술을 마시면 무섭게 고함을 쳤는데 그럴 때면 너무 무서워서 어디라도 숨고 싶었다고 한다. 그런 상황이 익숙하지 않은 상태에서 자녀들을 키워야했다. 그래도 끝에는 남편도 하나님을 믿고 주택건축을 하며 괜찮아졌다. 그러다 IMF때 모아둔 재산을 전부 써서 시내로 나왔다. 그 당시 아들은 대학교 다니고 딸은 미국으로 유학을 갔다. 딸이 2년을 공부해야 하는데 1년 만에 돌아와야 했다. 그래도 영어에 능해 포항에서 학원을 하며 잘 살다가 시집을 가서 지금은 수원 신도시에 산다. 사위는 군인으로 있었는데 중령으로 있다가 지난해 가을에 예편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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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뇌수술을 하고 몸이 안 좋아져 일을 많이 할 수 없어서 시내에서 사는 것보다 시골에서 사는 게 돈이 덜 나가겠다 싶어 2011년 6월 27일에 곡강으로 이사 왔다. 그랬더니 이 집에 들어온 해에 태풍이 나서 집을 수리하느라 돈이 많이 들었다. 그후로도 화장실을 만들고 마루를 새로 하는 등 보수를 자주 해야 했다고 한다. 요즘 김권사는 철도 관리 사무실에서 청소를 하고 버섯농장에서 일주일에 삼사일정도 일을 한다. 새벽기도 다니면 감사하고 그저 이대로 사는 게 소망이다. 집에 가만히 있으면 아무 할 일이 없다며 새벽기도에 가고 말씀보고 찬송하는 게 감사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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