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곡강교회의 역사와 성립

 

1957년 추석날 너구마을에서 첫 예배를 드렸다. 박두만 장로 시무.


 

그때까지 마을에서 예수를 믿는 사람은 홍리분 집사 뿐이었다. 그는 대도교회에서 신앙생황을 하던 사람으로, 결혼을 하고 너구마을로 이주하면서 죽천교회에 출석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너구마을에도 교회가 있기를 기도하면서 죽천교회 박두만 장로를 모시고 1957년 추석날 너구마을 황장군묘 자리에서 첫 예배를 드렸다. 한국전쟁 때 월남하여 흥곡마을에 살던 김용호 청년도 이 예배에 참석하였고 죽천교회 교인들과 마을 청년, 여성, 아이들도 참석 하였다.

 

부례문(Rev. Raymond C. Provost Jr., 1919~1997)선교사는 미국 북장로회에서 파송되어 대구를 스테이션으로 하던 선교사로 1948년도부터 1962년까지 경동노회에서 사역하였다. 그는 연희학교(연세대학교)에서 강의하다가 부마리아 선교사(Mariella Talmage Provost, 1923~2014)와 결혼한 뒤 계명대학교를 거쳐 경주 문화고등학교 교장을 지내면서 경상북도 동해안지역에 선교하였다. 그는 1957년 10월 25일에 곡강교회에 왔었으며, 1963년에 미국으로 돌아갔다.

(참고) 1957년 총수입은 87,030환인데, 포항제일교회로부터 죽천교회를 통해 지원된 금액이 59,280환, 부례문선교사 10,000환, 홍리분헌금 1,000환 성탄헌금 300환 기타이고 총 지출은 86,445환이었다. 당시에 쌀 1되 값은 270환이었다.

 

1958년 첫 교회당을 건축하였다.

1957년에 첫 예배를 드린 뒤 주일과 수요일에 홍리분 집사의 초가삼간과 마을회관 앞에 있던김용호청년의 처남이 운영하는 가게 마당에서 예배하였다. 이때 방순이씨의 시아버지가 곡강리866번지 교회부지를 기부하여 지금 교회당 앞의 자리에 교회를 짓게 되었다. 포항제일교회에서 기부한 재목을 어장 배로 바닷길을 타고 실어 와서 죽천 선창에 하역해 놓았었다. 너구마을에서는 교회 지을 나무를 옮기는 데 도와달라고 마을사람들에게 부탁하였고, 마을사람들은 모두 소를 몰거나 지게를 지고 죽천으로 가서 힘을 합쳐서 운반하였다
 1958년까지 교회는 죽천교회와 분유대체비 및 보조금으로 운영되었고, 1959년부터 약간의 헌금이 있었으나 교회재정이 자주 부족하여 홀리분, 반순이 집사에게 차용하곤 했다. 처음 지은 교회는, 목재로 기둥을 세우고 흙으로 벽을 쌓아 발랐다. 바닥은 흙바닥에 가마니를 깔았고 지붕은 군용 텐트를 씌웠다. 포항제일교회에서 필요한 재정을 보내 주었다.

 

1959년 교회당을 고쳐지었다. 김영상 장로 시무.

교회당을 다 지었다고 교인들이 감사하고 행복했으나 1년도 못 되어 1959년 '사라'호 태풍을 만나 교회 흙벽이 다 무너져 버렸다. 곡강교회를 돌봐주건 죽천교회도 태풍에 해를 입어서 도와주기 어려웠지만, 김영상 장로를 파송하여 교회 보수를 지원해 주었다. 곡강교회에서는 자체의 청년들과 교인들이 모두 보수작업에 나섰다. 김영상 장로는 예배를 인도하면서 보수를 지도했고 포항제일교회는 마루를 까는 비용을 지원하였다.
 이때 고쳐지은 교회는, 벽을 합판으로 두르고 지붕을 함석으로 덮었으며 바닥은 마루를 깔아서 첫 교회보다는 나은 건물이었다.

1961년 조복생 전도사 시무.

1963년 이영수 전도사 시무.

1964년 신진찬 전도사 시무.

1965년 신창국 전도사 시무.

1966년 김도역 전도사 시무.

(참고) 1966년 8월 1주 헌금액이 50원, 2주  48원, 3주 27원, 4주 6원이었다. 1966년의 맥추감사 봉헌자는 5명이었는데 헌금 1,200원과 보리쌀 7되, 밀 3되였다. 당시에 석유 1되 값은 25원이었다.

 

 

1967년 최복란 전도사 시무.

1970년 1월 이종태 전도사 시무.

1970년 8월 이규상 전도사 시무.

1971년 블록건물 교회당을 건축하였다. 박석해 전도사 시무.

교회당을 짓고 태풍 이후 고쳐 지은 뒤 5~6년이 지나자 점점 낡아갔는데 고칠 여력이 없었다. 어느날 김용호 집사가 봉림불 아래 곡강 어귀에 나갔는데 바다에서 무엇이 일렁일렁하는 게 보였다. 무엇인가 싶어서 가까이 가보니 엄청나게 길고 큰 나무였다. 아마 외국에서 목재를 무역하는 화물선에서 흘러내린 것이었던 듯한데, 위아래가 다듬어진 아주 좋은 목재였다. 김집사는 혼자서 그 재목이 흘러가지 않도록 강 하구까지 간신히 끌어다 묶어 놓고 마을로 돌아가 이튿날 황영백 집사 등의 교인들과 함께 와서 육지로 끌어올렸다. 나무가 너무 길어서 수레 한 대로는 실을 수가 없어서 수레 두 대를 앞뒤로 대고 나무를 걸쳐서 옮겼다. 당시에 시무하던 박석해 전도사는 목수였는데, 교회에 필요한 길이를 재어 와서 길이에 맞추어 잘라서 교회로 운반하였다. 교회 지붕의 골조를 그 나무로 했는데, 나무 하나로 골조를 다 하고도 남았다. 당시에 마을까지 차량이 들어올 도로가 없었으므로 시멘트 블록을 동곡 언덕 너머 찻길에 내려놓았었다. 교회에서는 청년들과 학생 50명 가량이 한두 장씩 지고 옮겨서 집을 지었다.
 이렇게 지어진 교회당은, 시멘트 블록 벽체에 지붕은 함석으로 덮었고 바닥은 나무판을 대었다. 의자가 없어서 바닥에 앉아 예배했는데, 흥해중앙교회에서 의자를 교체하면서 헌 의자를 가져가라고 해서 가져다 썼다.
 이때 사택을 지었는데 작은 초가집이었다. 나중에 새마을운동을 하면서 슬레이트 지붕을 덮었다. 이 사택은 1979년에 철거하고 그 자리에 새 사택을 지었다.

 

1974년 조의동 장로 시무.

(참고) 1974년 맥추감사 봉헌자는 17명이었는데, 헌금 1,300원, 보리 1가마 25되, 보리쌀 34되밀 1말이었다. 연간 총수입은 151,855원, 총지출은 146,644원이었다

 

1977년 조영식 전도사 시무.

1979년 사택을 신축하였다. 안학용 장로 시무

안학용 장로는 1979년 부임하여 시무하였는데, 아들이 미국에 있었다. 그때 사택이 낡아 매우불편하였는데 1983년 미국에 있던 아들이 헌금을 보내오자 이것으로 사택을 신축하였다. 위치는 현재 교회 마당의 느티나무가 있는 앞이다.이때 신축된 사택은 시멘트 블록으로 벽체를 하고 슬레이트를 덮은 건물이었다. 그 뒤 1996년이영환 목사가 수리하였으나 워낙 낡은 건물이어서 철거하고 2001년 현재의 사택을 구 교회당자리에 신축하였다

 

1979년 교회조직(전도사 안학용)
 서리집사 : 김용호 장정수 서분금 이귀순 박인숙 이석분주일학교: 이석분 김종화 김수자 김미자 김치경

 

 

 

 

 

2. 곡강교회의 발전

 

1983. 8. 23 장로 장립: 김용호, 집사 안수: 황영백

곡강교회는 대한예수교 장로회 통합측에 속해 있으나 이때까지는 당회장과 장로가 없는 미조직교회였다. 1957년 교회 설립시부터 교회의 기둥이 된 김용호 장로가 장립하고 1972년 마을로이주하여 교회의 일꾼이 된 황영백 집사에게 안수함으로써 교회 자립의 기틀을 마련하였다.1984년 교회조직(전도사 안학용)장로 : 김용호안수집사 : 황영백서리집사 : 강석환 이순길 최용광 서분금 이귀순 박인숙 이석분 최연난 이복순권찰: 이복도 모수학 정현숙 최외자 김영자 김태자 백향기 김정옥주일학교: 이석분 김치옥 류금자 정은주 김정립 김치경

1984. 3. 25 전광섭 전도사 시무.

1985. 9. 17 임순련 전도사 시무.(시무 중 목사안수)

1990. 4. 5 조성화 전도사 부임.

1995년 현재의 교회당 부지 (55-1번지, 130평)를 매입하였다

곡강교회 창립 당시의 교회 부지는 현재의 사택에서 느티나무 앞까지 866번지 125평이었다. 그러나 교회 사택이 하천부지를 접하고 있었으며 교회당 건물이 낡았으므로 교회당을 고쳐 지으면서 전체적으로 교회의 터전을 옮기기 위해 이 땅을 매입하였다. 처음에는 마을 냉동창고가 있는 밭을 구입하고 교회를 이전하려고 했으나 여러 가지 사정이 있어서 당시에 교회가 있던 이 부지를 매입하게 되었다.

 

1995년 곡강교회와 가까운 곳에 한동대학교가 설립되었다. 하나님의 대학을 지향하는 기독교대학이 설립됨으로써 곡강교회는 큰 변화를 겪게 되었다. 서울 온누리교회에서 사역하던 김종배 장로는 1995년 한동대학교 교수로 부임한 뒤 봉림마을에 집을 짓고 곡강교회에 전입하여현재의 교회당 신축을 주도하였으며 장로로 취임하여 현재까지 시무하였다.
김장로 이후에 많은 교수와 직원들이 전입하여 교회의 역군이 되었다. 그 중에서 도명술 집사,최태욱 집사, 정팔교 집사 등은 다른 교회로 옮겨 갔고 윤인길 장로는 소천하였다.
현재 한동대학교 및 한동국제학교와 유관한 교인은 다음과 같다. 김종배 장로, 김성근 장로, 이주일 집사, 김창욱 집사, 이종식 장로, 황성수 집사, 정명화 사모, 김한나 집사, 손화철 집사, 김미경 집사, 김신균 집사, 이완 집사, 김윤규 장로, 김순정 집사, 권택영 집사

1996. 3. 17 이영환 목사 부임

1997. 4. 10 54회 포항노회시에 교회의 명칭을 [곡강교회]에서 [곡강중앙교회]로 변경하였다.

곡강교회의 명칭은 설립 당시부터 변함없이 [곡강교회]였으나, 이때 곡강초등학교 앞에 타 교단의 곡강제일교회가 설립되어 약칭을 곡강교회로 쓰면서 명칭상의 혼란이 있었다. 이런 혼란을 없애기 위해 공동의회의 결의로 교회 명칭을 [곡강중앙교회]로 변경하였다

 

1997년 새 교회당을 신축하였다.

새 교회당은 1997년에 콘크리트 타설조 3층 건물로 신축하였다. 1층에는 교육관과 주방 및 책사랑방과 목양실이 있고, 2층에는 예배당과 유아실, 3층에는 유아실과 방송실이 있다. 공간 부족을 해소하기 위해 2008년 유치부실, 2014년 중고등부실과 청년부실, 2016년 목양실을 각각 컨테이너 가건물로 부가하였다.

1997. 5. 4 창립 40주년을 맞아 40주년 기념예배 및 새성전 헌당과 임직예배를 드렸다.

장로 은퇴 : 김용호
장로 장립: 황영백
장로 취임 : 김종배
권사 임직 : 박인숙 박춘자

 

1998. 12. 17 이영환 목사 사임.

1998. 12. 29 김종하 목사 부임.

1999. 2. 21 권현정 선교사 파송예배. (연변)

1999. 12. 26 최숙희 선교사 파송예배. (카자흐스탄)

2003. 10. 26 목사 위임 : 김종하

장로 은퇴 : 황영백
장로 장립: 김성근
권사 임직: 박상순 이석분
명예권사 임직: 최연란
집사 안수: 손광 김윤규
집사 취임 : 장영락

2004. 1. 4 박영권 교육전도사 부임.

2006. 12. 25 박영권 교육전도사 사임.

2007. 7. 8 안치량 교육목사 부임.

2007. 11. 9 창립 50주년을 맞아 희년감사 및 은퇴 임직예배를 드렸다. 

권사 은퇴 : 박인숙
장로 장립: 손광 김윤규 장영락
집사 안수: 원재근 김치경 이종식 황택근 김태용 유상원
권사 임직 : 안영예 김영숙 김태자 정태숙 이순애 김정희

 

2009년 3월 1일 김병관 교육전도사 부임.

2014년 1월 26일 김병관 교육전도사 사임.

2014년 1월 26일 김병관 온현정 선교사 파송.(P국)

2015년 6월 28일 안치량 교육목사 사임.

2017년 3월 포항노회시에 교회의 명칭을 [곡강중앙교회]에서 [곡강교회]로 변경하였다.

곡강교회의 명칭은 설립 당시부터 변함없이 [곡강교회]였으나, 1997년 타 교단의 '곡강제일교회'가 설립되어 약칭을 '곡강교회' 로 쓰면서 명칭상의 혼란이 있었다. 이런 혼란을 없애기 위해 당시에 교회 명칭을 [곡강중앙교회]로 변경하였으나, 그 교회가 명칭을 바꾸면서 혼란도 없어졌으므로 원래의 [곡강교회] 명칭을 회복하였다

 

2017년 6월 10일 창립 60주년 감사 및 은퇴 임직예배를 드렸다.

장로 은퇴 : 김종배 손광
장로 장립: 원재근 김치경 이종식
집사 안수: 안진구 손화철 박정로 이완
권사 취임 : 김성자
권사 임직: 전미영 천경민 최미경 김유진
명예권사 임직: 탁팔수 배봉순 김재학 편차생 최외자

 

 

 

 

3.곡강교회의 특별 활동

 

선교회 활동

2000년 곡강교회는 4개의 '선교회'를 출범시켰다. 이는 지금까지 성별과 연령에 의해 구성되었던 기존의 남녀 전도회와 달리, 임무를 가지고 활동하는 역동적인 선교활동을 위한 것이었다. 이 '선교회'들은 2011년 ‘모둠’이 출범하면서 형태를 바꾸게 된다.

 

작은자선교회

소외된 이웃을 돌보는 임무를 가지고 있다.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손을 내밀고,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도움을 주는 활동을 한다.

사랑의 집짓기

1호 : 2000년 흥해읍 칠포리 양광덕 할아버지 집을 지었다.

칠포 산자락에 있는 쇠락한 노부부의 집을 두 번 고쳐드렸으나 쇠락상태가 심하여 집 전체를 철거하고 새로 지었다. 전 교인과 함께 해병대원이 집짓기에 참여하기 시작한 일이다. 현재 할머니는 별세하였다.

2호 : 2001년 청하면 청계리 성연이네 집을 지었다.

할머니와 두 손자가 사는 조손가정의 집이 낡아서 본채를 두고 곁채를 새로 지었다. 전 교인이 참여하여 건축하는 경험이 시작된 일이다. 현재는 형제 모두 군대에 다녀와서 서울과 대전에 취업하였다.

3호: 2002년 흥해읍 오도리 언어장애 할머니의 집을 지었다.

집이 퇴락하여 전교인과 학생 청년들이 함께 지어드렸다. 현재 할머니는 건강이 호전되었으며 생활도 좀 나아졌다.

4호: 2002년 흥해읍 칠포리 정천수 씨네 집을 지었다.

칠포 마을 가운데 있는 정신지체장애 부부와 두 자녀의 집이 낡아서 전 교인이 지었다. 이 가정은 현재까지 교회에서 관찰하고 있으며 약간의 생계보조를 하고 있다. 5호: 2003년 청하면 덕성리 황노미 할머니의 집을 고쳤다.

청하정 뒷집의 독거 할머니 집을 증축해 드렸다. 할머니의 편의를 위해서 화장실과 욕실을 지어드렸다.

6호: 2004년 흥해읍 매산리 박근환 씨의 집을 지었다. 소아마비로 신체장애가 있는 가정의 쇠락한 집을 전 교인이 지었다. 현재 아버지는 작고하고 자녀 셋이 성장하고 있다

 

7호: 2004년 흥해읍 봉림마을 전성환 씨의 집을 지었다.

장애인의 집이 화재를 만나 불타버리고 폐가에 거주하고 있었으므로, 전교인이 합심하여 집을지어드렸다. 그 뒤 교인이 되어 다른 교회에 출석하고 있다.

8호: 2005년 흥해읍 학천리 마을 가운데 장애인 강귀순 씨 집을 지었다.

장애인 부부와 장애인 아들이 사는 집을 지었다. 인근의 다른 폐가에 살다가 쫓겨나게 되었는데전의 지주가 허락한 텃밭에 태양열 시설과 함께 집을 지었다.

9호: 2007년 흥해읍 용천리 서우연 씨 집을 지었다.

곡강초등학교 앞의 정신지체장애 어머니와 아이들이 사는 집을 지었다. 화장실도 없이 낡은 집에 살고 있었는데, 필요한 시설을 갖추어 지어드렸다.

10호 : 2011년 흥해읍 죽천리 김출이 씨 집을 지었다. 소아마비 지체장애인 부부의 집이 낡고 지대가 낮아서 살 수가 없었으므로, 전 교인이 바닥을높이고 조립식 주택을 외부에서 완성하여 옮겨 앉히고 편의시설을 설치하였다.

11호 : 2013년 흥해읍 대련리 노인부부의 집을 지었다. 외지에서 흘러들어와 마을 외딴 곳에서 산지기로 살던 노인이 그 집에서 나가게 되었지만 집이없었으므로, 마을 가운데 터를 허락받아 교인들이 힘을 모아 아담한 집을 지었다.

12호 : 2016년 흥해읍 금장리 이병권 씨 집을 지었다. 연세가 높아지면서 앞이 보이지 않게 되어 후천적으로 장애를 갖게 된 독거노인에게, 옛날 집이낡고 불편하였으므로, 화장실이 실내에 있고 턱이 없는 집을 새로 지었다.
 

 

새하늘새땅선교회

건강한 생산과 소비를 실천하는 임무를 가지고 있다. 교인들이 함께 주말농장을 가꾸고 건강한 먹거리를 생산하며 몸에 좋은 농산물을 소비하는 활동을 한다.

주말농장
2000년부터 교인들이 공동으로 생산하고 소비하는 주말농장을 시행하였다. 처음에는 흥해읍 곡강1리에 있는 손광 집사의 밭에서 운영하였으며 몇 년 뒤에는 교회에 가까운 안진구 집사의 밭에서도 시행하였다.

 

 

문화선교회

건전한 문화를 향유하며 공동체의 교양을 높이는 임무를 가지고 있다. 교회의 문화 행사를기획하고 간행물을 편집 출판하는 활동을 한다.

들판음악회

2000년 첫 들판음악회 : 실제로 추수가 끝난 논에서 시행되었다. 11월 12일 주일 오후에 볏짚을 깐논에서 첼리스트 전성희씨와 복음가수, 곡강 청년과 해병대원 등이 어울려 곳곳에 모닥불을 피우고해질 무렵까지 아름다운 음악회를 열었다.

2001년 복음가수 조광희씨와 다른 음악인들을 초청한 음악회는 날씨가 흐려서 교회 안에서 열렸다.2003년 복음가수인 한동대학교 조준모 교수를 초청한 음악회는 비가 내려서 교회 안에서 열렸다.2006년 복음가수 홍순관 집사를 초청한 들판음악회가 열렸다.

2007년 복음가수 홍순관 집사를 초청한 부활절 음악회 '다함께 봄'은 곡강교회가 주최하고 인근의 다섯 교회가 연합하여 곡강 야외공연장에서 열렸다.

 

 

군선교회

교회에 출석하는 해병대원들을 지원하는 임무를 가지고 있다. 해병대원에게 평안한 예배환경을 제공하고 신앙적 변화를 인도하는 활동을 한다.

해병대

해병대 1사단에 소속되어 흥해 해안을 방어하는 흥해중대는 곡강교회 인근에 있다. 해병대원 중에서 교회출석을 원하는 사람들은 부대에서 가장 가까운 교회인 곡강교회에 드문드문 3명 정도 나오고 있었다.

곡강교회는 1999년부터 적극적으로 해병대와 접촉하면서 승합차를 운행하는 등 활발하게 종교활동을 지원하였다. 그 결과 매주 십여 명의 대원이 출석하고 때로는 수십 명의 대원이 함께 예배하는 광경을 이루기도 했다. 그 중 일부는 신앙을 고백하고 곡강교회에서 세례를 받기도 했고 교회에 나온 인연으로 결혼한 사람도 있었다. 대원들은 평안하게 예배에 참여하고 공동체 활동과 청년부 활동에 동참하며 이웃돕기 사업에도 중요한 인력이 되어주고 있다.

부대 사정에 따라 2009년 중대본부가 이전하여 잠시 해병대원의 출석이 중단되기도 했으나 부대가 다시 옮겨오면서 교회출석이 재개되어 현재까지 활발하게 출석하고 있다.

 

 

 

 

열방선교회

선교사를 지원하고 우리 스스로 복음을 전파하는 임무를 가지고 있다. 국내외 전도사업에 참여하고 선교사를 파송하고 지원하는 활동을 한다.

선교사 파송

김병관 선교사는 1998년 한동대학교 학생으로 너구마을에서 자취하는 청년이었다. 당시 곡강교회에 출석하면서 교회와 마을에 정을 붙인 김 선교사는 학교를 졸업하고 한동대학교에 직장을 정하면서 다시 교회에 정착하였다. 그러던 중 선교의 소명을 깨달은 김 선교사는 부인 온현정 선교사와 함께 성경번역선교회의 선교사로 허입을 받아 한동대학교 통번역대학원에서 성경번역에 대해 공부하였다.

대학원과정에 있으면서 곡강교회의 중고등부 전도사로 일한 김 선교사 부부는 2014년 성경번역선교회의 지명에 따라 P국으로 파송되었다. 이때 곡강교회는 교회의 결의에 따라 김 선교사의 주 파송교회가 되기로 결의하였으며 김병관 온현정 선교사는 곡강교회가 파송한 선교사가 되었다.

 

 

 

 

모둠 출범

2011년 '모둠'을 출범하였다. 모둠은 종래의 선교회와 구역 개념을 통합하여 '교회 안에 있는 생명력 있는 작은 교회'를 지향하는 것이다. 가치관과 성향을 공유하는 모둠원들이 함께 예배하고 교제하며 새로운 모둠을 창출하도록 활동하는 것이다. 각 모둠은 모둠지기와 말씀교사와 모둠원으로구성되어 있다.

소망모둠 : 65세 이상의 연로한 교인들로 구성한다. 임무는 없으며 교회의 봉양을 받는다.

백합모둠 : 학업을 마친 미혼교인들로 구성한다. 신앙을 굳게 하고 다른 모둠을 지원한다.

작은자모둠 : 구 작은자선교회의 활동을 계승한다.

섬김모둠 : 교회 인근의 이웃들을 돌보는 임무를 가진다. 마을의 어른들에 대해 건강을 살피고 경조사를 챙기며 생활의 필요를 채워준다. 2015년 작은자모둠과 임무를 통합하였다.

만나모둠: 구 새하늘새땅선교회의 활동을 계승한다.

이슬모둠 : 구 문화선교회의 활동을 계승한다.

땅끝모둠 : 구열방선교회의 활동을 계승한다.

기드온모둠 : 구 군선교회의 활동을 계승한다.

 

 

 

 

4.곡강의 꿈

 

곡강리의 모든 마을들은 큰 변화를 맞았다. 모든 자연마을들이 급격한 인구감소를 맞아 인구과밀지역에서 인구희소지역으로 변하고 있다. 이는 원래 이 마을들의 생산력을 유지시켜주던 농업생산이 쇠퇴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또한 도시의 팽창과 공업지역 지정으로 인해 곡강 마을들은 외형상으로도 크게 변화할 예정이 되어 있다.

곡강에서 예측되는 큰 변화는 다음과 같다.

영일만 4산업단지 건설: 이 사업은 새로 건설된 영일만항의 배후 산업단지를 조성하는 사업이다. 이미 2산업단지는 조성되어 활용 중이며 3산업단지는 바닷가에 부지공사가 완료되어 있으나 공장이 입주하지는 않고 있다. 향후 산업단지의 활력에 따라 4산업단지가 조성된다면 곡강 2리가 모두 그 안에 포함되도록 계획되어 있다. 이 경우 곡강 2리는 흥곡서편의 임야로 이전할 계획이 잡혀 있다.

 

영일만항 진입도로 확장 개설: 포항 양덕지구에서 영일만항으로 직접 진입하는 도로를 개설하는 사업이다. 현재 양덕에서 천마지까지는 도로공사가 완료되었고, 임시 진입도로를 통해 일반산업단지로 통행하고 있다. 그러나 향후 이 도로는 마을을 통과하면서 곡강교회를 관통하여 2산업단지로 개통될 예정이다. 이 경우 곡강 2리는 동서로 분할되므로 역시 이전될 계획이다.

 

영일만항 지선 철도 개설: 포항에서 삼척으로 이어지는 동해중부선의 영일만항 지선을 설치하는 사업이다. 이미 사업의 상당 부분이 진행되었고, 곡강 1리의 윗부분을 관통하여 마을을 분할하게 되었다. 그러나 마을의 중심을 관통하지는 않았으므로 마을 전체가 이전하는 계획은 세우지 않았다.

 

울산 삼척 고속도로 영일만대교 건설:울산 삼척 고속도로의 포항구간은 개통 초기에는 포항 시가지 우회도로로 개통될 예정이다. 그러나 향후 영일만에 종단대교를 건설하고 울산에서 영덕으로 직진하는 고속도로를 계획하고 있다. 이 경우 영일만을 건너 온고속도로의 북쪽 부분이 곡강1리를 지나갈 것으로 보인다.

 

곡강지구 택지개발 : 한동대학교 진입도로 좌우에 광범위하게 택지가 개발되고 있다. 학교는 남송리에 속하지만 이 택지지역은 곡강리에 속한다. 계획에 의하면 최대 2천 세대의 주거지가 들어서고 학교와 편의 시설이 입주할 것이라고 한다. 최근에 계획지역에 나무를 다베어내고 흙을 채워넣는 공사를 하고 있었는데, 공사업체의 부도로 인해 공사가 중단되었다. 언제든지 공사가 완료되면 새로운 주거단지가 곡강에 생길 가능성도 있다.

 

이에 따라 곡강의 각 마을이 겪게 될 변화는 다음과 같을 것이다.

 

곡강 1리는 영일만항 철도지선이 건설되면서 마을이 양분되고 있다. 철도가 건설되면 마을의 북쪽 부분은 마을에서 분리되어 소규모 거주지로 변할 것이며, 새각단과 아랫각단을 중심으로 마을은 유지될 것이다.
곡강 2리는 마을이 통째로 이주할 예정이다. 아직 시기는 정해지지 않았으나, 영일만항 4단지 사업이 진행되면 현재의 너구, 동곡, 흥곡 모두 공업단지의 정비구역에 포함되게 된다. 그러면 모든 마을 사람들은 집과 땅을 수용당하고 흥곡 서쪽의 새 동네 조성 예정지로 이주하게 될 것이다.
곡강 3리는 현재의 위치에서 조용히 변화를 맞을 것으로 보인다. 칠포 해수욕장과 바닷가 수련산업의 번영 여부에 따라 마을의 성쇠는 변하겠지만 전체적으로 노인인구의 급증으로 인해 마을 전체가 쇠락할 가능성이 크다.

곡강 마을들이 어떻게 변하든 곡강은 모든 곡강 사람들의 추억과 꿈으로 남을 것이다. 곡강에서 나고 자라서 곡강을 떠나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곡강은 여전히 고향의 따뜻한 품으로 그리움 속에 생동하게 될 것이다. 차츰 마을을 떠났던 이들이 돌아오고 그들에 의해마을의 인심과 문화가 재생된다면, 곡강교회는 그 중심에서 그들과 함께 지역교회의 역할을해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곡강은 도시적 삶의 혹독함에 지친 사람들에게 쉼과 회복을 제공할 수도 있을 것이다.도심에서 멀지 않은 거리에 적당한 자연과 농토가 어울린 곡강 지역은, 바쁜 일상에서 발을멈추고 뒤를 돌아보고자 하는 현대인에게 넉넉한 휴식과 회복의 터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여기 자리 잡은 곡강교회는, 구원의 복음과 천국의 소망을 전하면서, 현대인이 원하는 날마다의 쉼과 회복도 주어야 한다는 임무를 기쁘게 감당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