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해제일교회는 저가 후포중앙교회를 시무하고 있을 때에 겸직하여 개척한 교회입니다. 1979년 5월 어느 주일로 기억됩니다. 평해감리교회를 섬기던 제직 10여명이 후포중앙교회로 와서 함께 예배드린 후에 저에게 “전도사님, 우리 평해에도 장로교회 하나를 개척하여 세워주시면 안됩니까?" 하였습니다. 그래서 즉시 영덕시찰장 남성도 목사님께 보고 하였으며, 또 남 목사님은 노회에 보고하여 노회전도부가 와서 설립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영덕시찰장 남 목사님은 또 다시 지금은 시찰회나 노회는 예산이 없으니 이 전도사가 우선 겸직하여 알아서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같은 말씀은 전에 후포중앙교회를 개척할 때와 똑같이 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당시 강용창 집사님 안방에서 주일예배를 10시에 드리고, 저는 다시 택시로 후포중앙교회로 와서 11시에 주일예배를 드렸습니다. 이것은 영덕시찰회에서 두 번째로 저에게 개척에 대한 전반적인 사항을 무책임하게 맡겨 주었지만 제가 거부하지 않고 억지로라도 수용하였던 것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1975년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에서 결의하기를 한국교회선교 100주년이 되는 1985년까지 매년 300개 교회를 개척하도록 하였고 각노회가 그 개척교회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것을 저도 잘 알고 있었으므로 그 일을 맡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평해제일교회를 개척하기로 하고 시작은 하였으나 앞일이 막연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당시 평해제일교회를 주동하고 있던 강용창 집사님께서 저에게 전화를 하였습니다. 곧 강 집사님은 영덕시찰회와 노회를 의지하고 교회를 세우고자 했으나 두 곳으로부터 지원이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선친의 묘가 있는 선산으로 가서 거기서 혼자 고뇌에 찬 기도를 하다가 비록 부모님께서 유산으로 물려준 땅이지만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는 일에 바치기로 결단하고 산에서 내려와서 저에게 전화를 걸었다는 것입니다. 그 땅은 강 집사님 댁에 있는 텃밭 약 70여 평인데 그것을 교회로 헌납하기로 결심한 것이었습니다. 강 집사님과 저는 너무 흥분되고 감동이 되어 서로 울먹이면서 통화를 하였습니다. 저는 곧바로 영덕시찰장 남 목사님께 전화를 걸어 평해제일교회를 건축할 대지는 강용창 집사님께서 자기 소유를 헌납하였으므로 건축할 대지 문제는 해결되었으니 이제 시찰회와 노회에서는 평해제일교회 건축을 책임지고 건축비를 지원하여 주실 것을 강력히 청원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날의 답변도 전과 똑같았습니다. "지금은 예산 노회가 아니므로 이 전도사가 알아서 하면 나중에 지원하도록 노력해 볼께."라는 답변이었습니다. 그러나 평해제일교회는 희망을 가지고 건평 45평 정도로 2층을 설계하여 건축허가를 받아 성탄절 전에 입당할 목표로 공사를 시작하였습니다. 그 해 7월 17일 오전 10시, 평해제일교회 건축기공식을 하면서 설교는 포항제일교회 김동익 목사님이 맡아 주셨습니다. 그 날은 이슬비가 약간 내렸지만 포항 십자당약국의 김응교 장로님도 참석하셨습니다. 김응교 장로님은 6.25한국전쟁 때에 동해안을 따라 피난 내려오시다가 여기 평해에서 얼마 동안 살았던 적이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그 후에 포항제일교회에서 평해제일교회 건축비를 지원하는데 김응교장로님이 큰 역할을 한 것으로 들었습니다. 이와 같이 설레는 마음으로 기공예배를 드리고 또 11시에는 후포중앙교회 헌당식을 거행하였습니다. 그 해는 제가 신학교를 가기 위하여 일주일에 이틀씩 안동으로 가서 경안성서신학원에서 수업을 하면서 진학준비를 하였던 최고로 바쁜 해였습니다. 곧 두 교회를 시무하면서 평해제일교회 공사 감독까지 하면서 입시준비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영덕시찰회와 포항노회의 지원 약속은 무성의 하였으므로 강용창 집사님은 실망감을 감추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남은 공사비와 밀린 건축자재비는 강 집사님 가정에서 다 부담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추진된 교회건축 공사는 성탄절에 가서야 겨우 장판을 깔고 겨우 입주하게 되었습니다. 1980년 1월부터는 제가 장신대를 간다는 이유로 평해제일교회와의 모든 일을 사임하였습니다. 2층으로 설계했으나 1층도 완공하지 못한 체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울진군은 본래 강원도였으나 1960년에 경상북도에 편입되었습니다. 그래서 한국선교초기선교사들이 선교분쟁을 방지하기 위하여 강원도를 감리교 선교지역으로 지정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울진군 내에는 장로교회가 하나도 없던 유일한 군이었으나 1975년 9월, 울진에서 개척하시던 이준기 목사님이 울진제일교회, 죽변제일교회, 풍전제일교회(현 덕구교회) 3개 교회와 함께 가입하시므로 전국적으로 장로교회 무교회군이라는 불명예를 씻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어 후포중앙교회와 평해제일교회가 개척되어 장로교회가 모두 다섯 교회가 되었습니다. 어느 지방을 가도 배타적인 성향은 다 조금씩은 있겠지만 특별히 울진 지역은 다른 곳에 비하여 본다면 배타적 성향이 강하다고 생각합니다. 울진 지역으로 밀려들어온 공직자들 중에는 하루속히 이 지역을 빠져 나갈 생각만 하고 몸과 마음을 다하여 공무를 수행하지 않는 자들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 중에는 울진 지역 사람들이 가진 강한 배타심에 상처를 입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물론 울진 사람들이라고 해서 다 그런 배타적인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것은 저의 30년 전 생각입니다. 그리고 울진 지역으로 전입하여 오는 장로 교인들은 자연스럽게 평해제일교회에 등록하게 되었습니다. 얼마 후에 교회에서는 당회를 구성하려고 공동의회를 열어 강용창 집사를 피택하였고, 그는 노회에서 실시하는 교육과 장로고시까지 합격하였습니다. 그러나 강용창 집사님이 임직 만료 기간 한 달을 앞두고 저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교회에서는 빨리 장로 임직식을 해야 한다고 서두르는데 강 집사 자신은 오히려 장로임직을 받고 싶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주동이 되어 평해감리교회에서 분리하여 나와서 장로교회를 세운 것이 마치 자신이 장로가 되고 싶어서 한 일로 비난받을 것이고 또 자신은 나이도 있고 하는데 이제 장로가 된다고 해서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고 하였습니다. 그때 저는 강 집사님에게 “집사님께서 말씀하시고 생각하시는 것은 다 이유가 있는 말씀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교인들 3분의 2가 집사님을 신뢰하여 장로로 피택하여 주셨으며 또한 노회고시부에서도 집사님을 검증하고 시험하여 장로의 자격이 있다고 인정하여 주셨으며, 지금까지도 그렇게 하였지만 앞으로도 교회의 무거운 짐을 지고 앞장서 일하여 주시면 우리도 교회를 열심히 섬기겠습니다. 하는 뜻으로 집사님을 장로로 피택하여 주신 줄 알고 인간적인 생각보다는 교회를 위하여 임직을 받는 것이 신앙적인 자세"라고 권면하였습니다. 평제일교회 이런 일이 있은 지 두 주일 만에 강용창 집사님은 평해제일교회 초대장로로 임직을 받았으며 교회를 섬기시다가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평해제일교회가 오늘에 있기까지의 수요일 밤 예배는 목요일에 와서 드렸으며 또 매월 3만원씩 사례비도 받았으며 자전거로 내왕하면서 교인들의 가정을 심방도 다녔습니다. 지금 와서 돌아보니 모두 보람 있고 아름다운 추억으로 생각이 됩니다. 2009년 평해제일교회 설립 30주년 기념예배 때 가서 말씀드렸지만 강 장로님을 비롯하여 초기설립 교인들은 모두 한 시대에 하나님이 사용하신 숭고한 신앙의 사람들이라고 칭찬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