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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흥수 이정애 부부

흥수씨 부부는 포항 시내에서 살다가 집을 지어 곡강에 왔다. 자녀는 딸 1명에 아들 1명을 두었다. 딸은 시집갔고 아들은 직장 다닌다. 처음 곡강에 왔을 때는 잠이 안 올 정도로 좋았다고 한다. 이 집이 당시 동네에서 유일한 2층집이었는데 매우 신경써서 지은 집이었고 공장이 하나도 없어서 경치도 좋았다. 그때는 농사도 짓지 않았다. 흥수씨는 원래 현대중공업에서 10년 가까이 엔지니어로 일했는데 IMF가 터지고 회사에서 퇴직하면서 98년도에 버섯농장을 시작 했다. 정애씨는 남편이 버섯을 키우자고 했을 때 대책이 없으니 어쩔 수 없이 같이 시작했다고 한다. 버섯을 기를 때 온도, 습도를 잘 맞춰야 하는데 잘못 해서 버섯이 다 죽기도 했다. 온갖 고생 끝에 방법을 터득해서 지금은 농사 경력이 20년 된다. 환풍기 시설, 공중에서 움직이는 트레일러 등 농장설비를 흥수씨가 손으로 만들었다.

원연호 할아버지

이 마을이 고향이다. 200년 넘게 현재 사는 터에 살았다. 집터에 아름드리 포구나무가 있었는데 새마을사업 하면서 길 낸다고 베어버렸다. 할아버지는 70년도에 이장을 했다. 그때가 새마을 사업 시작할 때다. 정부에서 시멘트를 335포를 줬는데 시멘트를 동네 크기에 상관없이 똑같이 줬더니 어떤 사람이 시멘트를 빼돌리는 부정을 저질렀다고 신고해 경찰서에 불려가기도 했다. 당시 마을 사람들은 주로 논농사와 밭농사를 지었다. 못이 생기기 전에는 면적만 넓었지 쓸 만한 땅은 없고 흉년도 잦았다. 먹을 게 없으니 소나무 껍질을 먹기도 했다. 이장을 하던 당시에 곡강 2동이 120호 넘는 제일 큰 마을이었는데 먹을 게 없어 타지로다 나가고 지금은 한 60호 밖에 안 된다.

조정자 할머니

고향은 포항 항구동이다. 아버지가 옛날에 직장 다닐 때 전근을 다녀 온 데로 떠돌면서 다녔다. 그러다 21살에 여기로 시집을 왔다. 딸은 못 낳고 아들만 4명 낳았다. 자식들은 포항 시내에도 있고 흥해에도 있고 울산에도 있다. 큰 아들이 금년에 60살이다. 큰 아들 이름이 택호인데 보통 택호엄마라고 불렸다. 요즘은 손주가 용재라서 사람들이 용재할매라 부른다. 옛날에 시어른은 동팥댁이라고 불렀다.

서정해 할머니

곡강 3동에서 태어나 중매로 시집을 와 현재 곡강 2동에서 산다. 남편은 홍해에 옥성 2동 고등학교 있는 곳이 본토다. 결혼해 여기서 함께 살며 농사일을 하고 남의 논을 부치기도 하며 지내다 지금은 세상을 떠났다. 자녀는 2남 1녀를 두었다. 첫째는 구미에 있다. 막내는 중국 남경에 엘지에서 일한지 4년 넘었다. 명절에도 만나지 못해 저녁 뉴스에 나오는 중국 소식을 보며 막내아들을 그리워한다. 2살에 6.25 사변이 나서 현대 중공업 부둣가에서 피난을 갔다. 여기 살던 사람들은 다 그 바닷가에서 피난했다고 한다. 즐거울 시간 없이 눈물 반 콧물 반 그리 살았다.

이기분 할머니

할머니는 구룡포 넘어 강구에 대보 호미곶이 고향이다. 53년 전에 곡강으로 시집와 아들 3명을 낳았다. 한 아들은 페인트칠 하고 집 만드는 일을 한다. 한 아들이 늦둥이를 낳아서 막내 손자는 이제 5살이다. 손자들이 매우 귀엽고 예쁘다. 고향에서는 고기를 잡아서 살림이 괜찮았는데 이 마을에 오니 먹고 살기 어려웠다. 밭농사를 어렵게 지어 보리밥을 먹었다. 농사도 지었지만 지금 곡강교회 자리에서 고방간을 했다. 보리 찧고 쌀 찧고 밀도 빻으면서 오는 사람 있으면 술 한 단지를 대접하며 지냈다. 마을에서 아직도 고방간 할매로 통한다.

안영자 김원수 부부

원수씨는 이 마을에서 태어나 잠시 시내에 나가 살다가 마을로 돌아왔다. 영자씨는 포항 대송 출신이다. 78년도 명절에 중매로 만나 두 달 만에 결혼했다. 원수씨는 부인과 둘만의 추억 같은 걸 못 만든 게 아쉽다. 아들만 2명 낳았다. 아들들은 죽천 초등학교를 나왔고 중학교는 학군제 때문에 포항중고등학교로다녔다. 한 아들 이름이 김우재이다. 옛날에 총각인 삼촌이 한 명있었는데 우재를 한방 톡 때려서 울리고 "우재 또 우재~" 하면 서놀리곤 했다. 현재 사는 터에서 예전부터 살았다. 옛날에는 이 집이 기와집이었는데 집이 좁고 겨울에 추워 제사 때 사람이 모이면 불편해서 집을 크게 새로 지었다. 옛날에는 한방에 모여 자기 힘들 정도로 식구가 많았고 집안행사를 하면 몇 촌까지 다 이 집에 모였다. 그런데 지금은 집에 부인과 친어머니밖에 없고 집안행사는 밖에 나가서 하니 집이 크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