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먼저 소식을 전하던 마당, 장독대 뚜껑 위로 서리가 내리던 새벽, 흙먼지를 일으키며 학교로 가던 발자국들—그 모든 계절을 지나 여기까지 걸어온 나에게. 해방이 막 끝난 동네의 가난과, 전쟁 뒤 남겨진 그늘이 오래도록 집안 기둥에 걸려 있었지만, 나는 매일의 일을 매일의 힘으로 건넜다. 연탄은 먼저 공기를 검게 물들이고서야 방을 데웠다. 사람 사이의 마음도 그랬다. 때로는 차갑게 굳었다가, 오래 불을 지피면 서서히 따뜻해졌다. 나는 말보다 손으로 살아냈고, 눈물보다 밥으로 하루를 건넜다. 배움의 문턱이 높던 시절에도, 단정히 옷깃을 여미고, 해야 할 몫을 내 몫으로 받아들였다. 살림은 기억이 쌓이는 방식이었고, 가족은 내가 그릇을 넓혀 배운 사랑의 다른 이름이었다. 오래 흔들린 날들 속에서도 나는 부러지지 않는 법을 배웠다. 편드는 편이 되기보다 붙드는 편이 되자고, 흉을 말하기보다 손을 덥혀 주자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래서일까. 지나온 길을 다시 더듬어 보면, 가장 어두웠던 밤이 가장 단단한 새벽을 데려왔다. 모자람이 서로를 가깝게 만들었고, 서러움이 나를 깊게 만들었다. 나는 오늘, 그 모든 흔들림이 나를 빚어 준 손놀림이었다는 사실을 조용히 고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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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화석 장로님의 신앙생활은 중학교 시절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특별히 누군가의 전도를 통해 교회를 다니게 된 것이 아니라, 부모님을 따르고 친구들과 함께 자연스럽게 교회에 나갔다고 합니다. 그의 집은 교회 사택 바로 옆에 있었고,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교회가 위치할 정도로 교회와 밀접한 생활 환경이었습니다. 78세인 현재를 기준으로 볼 때, 약 70년 전부터 교회를 다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릴 적 교회의 모습에 대한 기억은 매우 선명한데, 처음에는 교회 건물이 일반 가정집처럼 생겼고, 당시 교육관 자리에는 조그마한 교육관이 따로 있었다고 회상했습니다. 그곳에서 주일학교 예배를 드렸으며, 당시 주일학교 학생 수는 약 40명 정도였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