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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 신앙 여정: 기적과 헌신의 삶

정화석 장로님의 신앙생활은 중학교 시절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특별히 누군가의 전도를 통해 교회를 다니게 된 것이 아니라, 부모님을 따르고 친구들과 함께 자연스럽게 교회에 나갔다고 합니다. 그의 집은 교회 사택 바로 옆에 있었고,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교회가 위치할 정도로 교회와 밀접한 생활 환경이었습니다. 78세인 현재를 기준으로 볼 때, 약 70년 전부터 교회를 다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릴 적 교회의 모습에 대한 기억은 매우 선명한데, 처음에는 교회 건물이 일반 가정집처럼 생겼고, 당시 교육관 자리에는 조그마한 교육관이 따로 있었다고 회상했습니다. 그곳에서 주일학교 예배를 드렸으며, 당시 주일학교 학생 수는 약 40명 정도였다고 합니다.

문창섭장로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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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와 감사의 삶

신승팔 집사님의 신앙생활은 어린 시절, 국민학교에 다니던 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우연히 친구를 따라 교회를 가게 된 것이 그 시작이었으나, 군 복무 중에는 신앙생활을 제대로 이어가지 못하는 어려움을 겪으셨습니다. 군 제대 후에는 부친이 돌아가시면서 농사일을 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고, 이로 인해 교회와 신앙에서 멀어지는 시기가 몇 해 동안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신앙에 대한 갈증은 늘 마음속에 남아 있었고, 찬송가 소리만 들려도 마음이 기쁘고 넉넉해지는 것을 느끼셨다고 합니다. 이후 수몰로 인해 현재의 거주지로 정착하게 되면서, 황희동 장로님과 권 장로님의 권유로 다시 교회에 나오며 신앙생활을 재개하게 되었습니다.

정순남권사

역경 속 피어난 믿음의 꽃

장성진 권사는 영양 일월에서 7남매 중 한 명으로 태어났습니다. 스무 살이 되던 해, 부모님의 뜻에 따라 흥구리로 시집을 오게 되었으나, 결혼 후 그녀의 삶은 곤궁의 연속이었습니다. 밥 짓기, 물 긷기, 손이 얼어붙도록 찬물에 빨래하기 등 온갖 집안일을 도맡아 해야 했습니다. 당시 흥구리는 100가구가 넘는 대촌으로, 한 집에 6~7명, 많게는 10명에 달하는 아이들을 키우는 것이 흔한 일이었습니다. 담배, 고추, 벼, 보리, 콩 등 모든 종류의 농사를 인력으로 직접 지으며 자녀 다섯 명(2남 3녀)을 키워야 했기에, 젊은 시절의 가장 큰 어려움은 경제적 궁핍과 고된 노동이었다고 전했습니다. 장을 보기 위해 아기를 업고 보따리를 이고 4km 떨어진 진보까지 걸어 다녀야 할 만큼 고단한 삶을 살았으며, 그녀의 고생 담은 책 10권으로도 부족하다고 말했습니다.

파란만장한 삶 속 굳건한 신앙의 증인

김명순 권사님은 1944년에 태어나 올해 80대 중반의 연세이십니다. 권사님의 젊은 시절은 신앙생활과는 전혀 무관했습니다. 심지어 교회라는 단어조차 알지 못했고, 기도하는 방법도 전혀 몰랐다고 회고하십니다. 당시 권사님 가정에는 불교를 믿는 어른들이 계셨기 때문에, 교회는 절대로 발을 들여서는 안 되는 곳으로 인식하셨다고 합니다. 이러한 불교적 배경 속에서, 권사님은 스스로 미신을 지키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불교 어른들의 영향 아래 교회와는 완전히 단절된 삶을 사셨습니다. 권사님의 초기 삶은 청김면에서 시작되어 금막으로, 결혼 후 방전을 거쳐 현재의 흥구리 동네로 거처를 옮기는 과정을 겪으셨습니다. 먹고 살기 힘들었던 동네의 전반적인 어려움 속에서, 권사님은 이처럼 인생의 절반 이상을 하나님을 전혀 알지 못한 채 신앙 없는 삶을 살아가셨으며, 이는 훗날 찾아올 극적인 신앙 체험의 배경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