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등질 회장은 12대조 대에 입향한 이 마을의 토박이이고 부인 옥녀씨는 24세에 혼인하여 들어왔다. 지금까지 2남을 낳아 길렀는데 맏아들은 포항에 나가 살고 작은 아들은 부천에서 회사에 다니고 있다. 어린 시절에는 마을 앞들이 거의 삼분지 일이나 반가량이 갈밭이거나 늪이었다. 저습지가 바다보다 1.5m 높고 하단에 갑문이 없었으니 작은 해일에도 해를 입었고 봉림 앞까지는 늘 바닷물이 드나들었다. 1960년대에도 개간촉진을 위해 많은 노력을 했으나 잘 되지 않았고, 상주에서 온 사람이 저습지를 간척 해서 농사를 지으려다가 실패하기도 했다.
황영백 장로님은 죽장면 상옥 출신이고 이석분 권사님은 신광면 우각 출신인데 두분은 울산에서 만나 72년도에 결혼했다. 원래 황장로님이 이혼을 하고 전처소생이 있었고 권사님은 어릴 때 사고로 오른손이 불편했는데, 울산에서 동서가 중매를 해서 결혼을 했다. 현재 사는 곳이 외가였는데 결혼해서 인사를 하러 외가에 와서 보니 마을에 교회가 있었다. 여기 와서 약한 교회 섬기면서 살면 좋겠다고 생각해 이 마을에 이사를 왔다고 한다. 이사 와서 곡강교회를 다니는 동안 교회건물을 두 번 지었다. 처음 왔을 때 교회가 너무 허술하고 교인도 없었고 김용호장로님 가정이 교회를 붙잡고 있었다. 김용호장로님 혼자 교회를 섬길 때 교회가 문을 닫았다가 열었다가 아주 어려웠다. 마침 부흥회를 하고 새마을바람에 벽돌도 찍고 해서 교회를 지었다. 그 뒤 다시 교회를 지을 때는 논밭을 팔아서 짓기 시작했는데 김종배장로님이 곡강교회로 와서 크게 도움이 되었다. 그후 차차 한동대 학생들도 오면서 교회가 이만큼 발전하고 식구가 늘었다.
차분남 할머니는 우각 맞은편 학마을 동네 댓골 차씨다. 70년도에 이 마을에 사는 7남매 중 맏이인 배두하 할아버지에게 시집을 왔다. 딸 1명과 아들 2명을 낳았다. 맏이가 딸인데 포항에 있다. 곡강에 시집와 농사를 짓고 시어른을 모시며 시동생을 키우고 고등학교까지 보냈다. 우사 앞에 우물이 있었는데 그 물을 밤새 길러오고 나무도 직접 해서 밥을 했다. 남편은 나쁜 사람은 아니었지만 우유부단하고 끊고 맺음이 없어 힘들었다.
철숙씨는 용안 2리에서 태어났는데 초등학교 6학년 때 밖에 나가서 살았다. 곡강에는 중매로 결혼하면서 들어왔다. 계속 벼농사와 시금치 농사를 지었다. 남편이 장남이어서 시할아버지, 시할머니를 23년을 모셨고, 시아버지를 7년을 모셨다. 또한 시누이랑 시동생들을 다 시집 장가를 보냈다. 힘들기는 했지만 항상 즐겁게 살려고 노력한다고한다.
영일정씨의 입향조는 정병두씨의 7대조였다. 이귀술씨는 경주시 강동면 단구리에서 이 마을로 시집와서 2남 1녀를 낳았다. 아들과 딸은 모두 결혼하여 포항과 영천에 살고 있으며 7명의 손자녀를 낳았다. 처음에는 오직 농사만 지었다. 포구가 없으므로 어업은 하지 않았고, 일시적으로 재첩이 잡혀서 재첩잡이를 해서 돈을 조금 번 적도 있었다. 그 뒤에는 해수욕장 배후마을로 민박업이 성행했다. 온 마을이 민박 손님을 받아서 바빴지만 재미가 있었다. 그러나 그 뒤 고속도로가 나면서 민박이 안 되기 시작했다.
친정은 영덕 회동이었다. 이 마을의 최수덕씨에게 시집와서 2남 4녀를 낳았는데 남편이 70세에 세상을 떠났다. 아들들은 모두 포항에 살고 딸들은 포항과 부산에 산다. 손자녀들이 할머니를 만나러 오는 것이 희망이다. 처음 시집왔을 때는 낯선 고장에 풍속이 달라서 많이 곤란했다. 바닷가 생활이 마음에들지 않고 살림도 곤궁하였다. 당시에는 배를 곯는 이들도 있었다고 한다. 남편이 떠나고 75세 되던 무렵부터 눈이 보이지 않기 시작했다. 지금은 시각장애 상태에 있다. 가까운 이웃 나들이는 하지만 생활은 불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