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경상북도 영덕군 매정이라는 마을에서 태어났어. 그 마을은 말 그대로 ‘믿음의 마을’이었지. 마을 주민들 거의 전부가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었고, 주일 아침이면 종소리만 울려도 알아서 예배당으로 발걸음을 옮겼어. 아이고, 그때는 예배 빠지는 사람 찾는 게 더 어려울 정도였으니까. 우리 집도 예외가 아니었지. 아버지는 시골 농부였지만, 믿음으로 단단하신 분이었어. 새벽이면 꼭 기도로 하루를 시작했고, 주일엔 손에 뭐 들고 나가는 일은 절대 없었어. 장을 보러 가는 것도 금기였고, 바느질 하나도 안 했어. 그만큼 주일은 거룩한 날로 여겼지. 나는 그런 분위기 속에서 자라서 그런지, 예배와 기도, 찬송이 자연스러웠고, 교회는 내 숨 쉴 곳 같았어. 지금도 생각나. 우리 어머니가 된장국 하나 끓이는 것도 토요일 밤에 다 해놓고, 주일 아침엔 그저 데우기만 했지. 그게 믿음이었고, 하나님을 향한 예의였어. 아이들 옷도 다려놓고, 새 신발 신기고, 단정하게 머리 빗겨서 교회 보내는 그 모습이 눈에 선해. 그런 집안에서 컸으니, 믿음이라는 게 따로 배운 게 아니라 그냥 몸에 밴 거야. 나는 그 시절이 너무 고맙고, 그 마을이 그리워. 사람들 다 가난했지만, 마음만큼은 넉넉했고, 어려울수록 더 기도하고 서로 도왔어. 믿음이 뿌리처럼 마을에 내려 있었던 거지. 그 믿음의 땅에서 자란 나는 지금도 그 향기를 잊지 못해. 신앙은 가르치는 게 아니라, 보여주는 거라는 걸 나는 매정 마을에서 배웠지.
나는 어려서부터 공부랑은 인연이 없었어. 학교에 보내줘도 앞문으로 들어갔다가 뒷문으로 도망치기 일쑤였지. 아버지는 그런 나를 붙잡아 오느라 진땀을 흘리셨고, 결국엔 "얘는 안 되겠다" 하시고 일찍 시집보내기로 결심하셨지. 학교라고는 도합 30일 다녔을까? 이름 석 자 쓰는 것도 겨우였으니 말 다 했지. 그런 내가 지금 교회 권사로 40년 넘게 신앙생활을 했다고 하면, 사람들은 놀라. 하지만 난 가끔 생각해. "그때 공부 안 한 게 하나님 뜻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만약 공부를 했더라면, 이 길로 들어서지 않았을지도 모르거든. 내 삶엔 지식보다 믿음이 먼저 들어왔고, 그 믿음이 지금까지 나를 이끌어왔어. 어릴 땐 울진에서 살다가 부산도 가고, 영양도 거쳐 시집을 왔어. 참 유난한 길을 걸어왔지. 남들처럼 정규 교육을 받은 건 아니지만, 나는 삶으로 배웠고, 고난으로 익혔고, 하나님 앞에서 무릎 꿇으며 지혜를 배웠어. 나처럼 학교 못 다닌 사람도 하나님께 쓰임받을 수 있다는 걸, 나는 증명하고 싶었어. 지금 와서 돌아보면, 그 시절 그렇게 공부와 멀어진 것도 감사한 일이야. 하나님이 나를 따로 부르신 거니까. 난 책상 앞에 앉기보단, 예배당 바닥에 무릎 꿇는 법을 먼저 배웠고, 칠판보다 성경 말씀이 더 익숙한 삶을 살아왔지. 그게 내 길이고, 내가 받은 복이었어. 사람들은 배움이 없으면 못 한다고 하지만,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어. "믿음 하나면 충분하다." 내 인생엔 그 믿음이 있었고, 그 믿음이 나를 여기까지 데려다 줬다네.
최관우 집사님은 현재 72세이시며, 그의 신앙생활은 약 11년 전 예기치 않은 사건을 계기로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집사님은 오토바이를 운행하며 생업에 종사하고 있었으나, 음주운전으로 인해 오토바이 운행 정지 처분을 받게 되었고, 이로 인해 갑작스럽게 일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삶의 전환점을 맞이한 그는 청소년 수련원에 들어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직원으로 지내면서 자연스럽게 신앙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고 회고합니다. 신앙생활을 시작하기 전, 집사님은 잠시 천주교를 다녔던 경험이 있지만, 당시에는 신앙과 밀접하게 지내지 않았음을 밝혔습니다. 그는 신앙생활을 시작하기 전의 자신을 '이기적이고 자신만 생각하며, 남의 어려움이나 고통을 전혀 몰랐던 사람'으로 기억합니다.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없었고,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솔직하게 인정했습니다. 그는 타인이 고통받는 것을 알지 못했으며, 오직 자신만을 중요하게 여겼던 이기적인 사람이었다고 회고합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을 하면서 그의 내면에는 큰 변화가 찾아왔습니다. 집사님은 "나보다도 우선 상대방이 너무 고통스럽다는 것을 이제 알게 되더라고요"라고 말씀하시며, 타인의 마음과 감정에 깊이 공감하기 시작했다고 고백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단순히 교회를 다녀서만이 아니라, 나이가 들어가면서 자연스럽게 상대방을 먼저 생각하게 된 결과라고 덧붙였습니다. 젊었을 때는 힘이 넘쳐 자신만을 생각했지만, 이제는 타인을 배려하는 마음이 커졌다는 것입니다. 이는 그의 삶에서 신앙이 가져온 가장 큰 긍정적인 변화 중 하나로 보이며, 이기적인 태도에서 벗어나 타인의 고통을 헤아릴 줄 아는 성숙한 신앙인으로 거듭나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그는 이 변화를 통해 자신의 삶과 타인의 삶을 바라보는 시야가 확장되었음을 시사합니다.
박형기 장로의 신앙은 어머니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어릴 적부터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추운 날에도 새벽 기도를 다니시던 어머니의 모습을 보며 자랐다고 회고한다. 어머니의 고향인 청송에는 교회가 없었으나, 시집와서 성법교회에 다니기 시작했고, 그 새벽 기도의 모습은 지금도 장로님의 기억에 가장 선명하게 남아있다. 박 장로는 그 어머니의 기도가 자신의 신앙의 뿌리가 되었다고 믿으며, 지금도 어머니의 믿음을 따라 힘닿는 데까지 새벽 기도를 다니며 신앙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그의 굳건한 믿음은 어머니가 남겨주신 소중한 유산임을 강조하며, 그 신앙을 지켜나가는 것이 삶의 중요한 부분임을 밝혔다
최말림 권사님은 마흔 살 무렵, 남편의 병고를 계기로 신앙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남편은 어린 시절 홍역을 앓은 후유증으로 숨이 차고 피를 토하는 등 오랜 투병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마을에 교회가 많았음에도 이전까지는 교회를 다니지 않았던 권사님은, 김 권사님과 김태수 장로님의 끈질긴 권유를 받게 됩니다. "예수 믿으면 낫는다, 하나님이 고쳐 주실 것"이라는 그들의 말은 권사님의 마음에 불씨를 지폈고, 마침내 하나님께서 권사님을 부르시어 교회를 찾게 되었다고 회고합니다. 남편은 약 1년간 갈멜산 기도원에서 지내며 병세가 호전되기도 했고, 그 후 4~5년을 더 살았지만 결국 47세에 세상을 떠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