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명 - 사랑이 22년 11월10일 3.55kg 순천 미즈병원에서 태어나다.
영일정씨의 입향조는 정병두씨의 7대조였다. 이귀술씨는 경주시 강동면 단구리에서 이 마을로 시집와서 2남 1녀를 낳았다. 아들과 딸은 모두 결혼하여 포항과 영천에 살고 있으며 7명의 손자녀를 낳았다. 처음에는 오직 농사만 지었다. 포구가 없으므로 어업은 하지 않았고, 일시적으로 재첩이 잡혀서 재첩잡이를 해서 돈을 조금 번 적도 있었다. 그 뒤에는 해수욕장 배후마을로 민박업이 성행했다. 온 마을이 민박 손님을 받아서 바빴지만 재미가 있었다. 그러나 그 뒤 고속도로가 나면서 민박이 안 되기 시작했다.
춘라씨는 봉림불 청년이고 판돌씨는 너구마을 처녀일 때 연애를 했다. 연애 중에 군대에 갔고 월남에 맹호부대로 파견되었다가 제대하고 결혼했다. 2남1녀를 낳았고 모두 결혼하여 포항에 나가 살면서 5명의 손자녀를 낳았다. 처음에는 쌀농사와 시금치 농사를 지었다. 해수갑문이 설치되어 경제적으로 호전되었다. 해수욕장이 생긴 것은 경제적으로 아무 영향이 없었다. 20년 전부터 시금치 농사를지어 현금수입이 늘어났다. 그러나 10년 전쯤부터는 시금치에 연작의 해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같은 땅에 여러 해 동안 같은 작물을 생산하니 땅이 피로해지는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지금은 수확이 전만 못하다. 계절에 따른 특별한 동네 행사는 없고 정월 보름날 모여서 윷을 놀고 마을 회의를 하는 정도는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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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택씨는 이 마을 토박이이다. 청년 때 부산에 직장 생활하러 갔다가 순임씨를 만나 결혼했다. 결혼한 후 포항 연일로돌아와 살고 있는데 10년 전에 곡강에 사시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집을 비워 둘 수도 없고 고향생각도 나서 천택씨는 이 마을로 주민등록을 이전하고집을 지키고 있다. 그러나 지금도 생활근거는 연일에 두고 있으며 여기서 농사도 조금지으며 오가곤 한다. 2남2녀를 두었으며 다들 결혼하여 나가 살고 있다. 특히 차남이 미국에서 결혼하여 살고 있는데, 공부하러간다더니 거기서 자리를 잡아버렸다고 한다. 한 번 다니러 가고 싶은데. 아들 전화가 와서요즘 미국에 입국하는데 무슨 까다로운 심사를 한다는 소문이 있으니 노인들이 공항에서 고생할까 걱정된다면서 좀 있다가오시라고 했다고 한다.
1957년부터 마을 위에 천마지를 축조하기 시작해서 몇 년에 걸려서 못을 막았고, 들판가운데를 흐르는 하천을 정비했다. 이 과정에서 봉림호의 끝 봉림불 앞에 해수갑문을설치하여 역류방지시설을 만들고 간석지 바닥을 준설하여 제방을 만들었고, 천마지가완공되자 저습지의 많은 부분이 농지로 바뀌었다. 이어서 1970년대 중반에는 정영규 동장과원연호 동장 및 이등질 새마을지도자를 중심으로 경지정리 사업이 시행되었다. 확장된농지는 지대가 낮고 물 사정이 좋았기 때문에 주로 벼농사를 지었다. 이로써 저습지 전체가농지로 전환되고 통일벼가 보급되면서 곡강의 미곡생산이 급증하였고 마을의 생활환경이크게 개선되었다. 또한 이 사업은 시행 기간 동안 동민의 취로를 적극 지원하였기 때문에, 농가수입에도 크게 도움이 되었다. 당시의 취로대장을 참고하면, 대부분의 동민은 이 사업에 노역으로 참여하고 보수를 받았으며 그것이 당시 생활개선의 기초자금으로 사용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