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의 꽃말처럼 사랑과 헌신의 삶으로 가족을 위하여 살아온 영덕읍교회 박영자 집사님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정종섭 장로님은 1947년에 출생하셨으며, 그가 두살이던 1949년경 어린 시절 심한 경기를 앓았습니다. 위로 두 분의 누님이 있었고 장로님은 아들로는 맏이였는데, 경기가 심하여 부모님이 양육에 큰 어려움을 겪으셨습니다. 병원에 자주 다녔음에도 잘 낫지 않자, 모친은 목욕재계 후 몸을 단장하고 진보에 있는 한 절을 찾아갔습니다. 밤새도록 절하며 공을 들이다 깜빡 잠이 들었는데, 꿈속에서 부처의 목이 부러지며 그 안에서 예상과 달리 ‘상건불’이 나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 실망스러운 경험은 모친으로 하여금 절에 대한 기대를 접고 교회를 찾아보게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 당시 석포 가구교회의 박대규 신학생이 흥구 동리에서 겨울 방학 중 노방 전도와 전도 집회를 열고 있었고, 모친은 이 집회에 참석하여 마음에 깊은 감동을 받고 신앙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장로님의 경기로 인해 어머니가 여러 곳을 전전하다 교회를 통해 문제가 해결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장로님 자신은 경기가 언제 멈췄는지 정확히 모르지만, 서너 살 무렵부터는 경기가 덜해지고 건강을 찾았을 것이라고 회상했습니다.
업로드중입니다.나는 영덕군 지품면 오천2리에서 태어나서, 지금까지 쭉 이 마을을 떠난 적이 없네. 태어난 집도 여기, 지금 살고 있는 집도 여기지. 어릴 적엔 오천1리 쪽에 큰집이 있어서 형제들하고 같이 살다가, 내가 살림을 차리면서 이쪽으로 내려왔지. 그래서 내 삶의 시작도, 끝도 오천이 될 것 같아. 형제는 일곱 남매였는데, 난 그중 셋째였어. 그 시절엔 형제 많은 집이 흔했지. 형님은 참 똑똑했어, 그 시절에 대학교까지 다녔으니까. 근데 나는... 6학년 2학기 때 학업을 멈췄지. 6.25 전쟁이 터지고, 아버지 돌아가시고, 할아버지가 우리를 이끄셨거든. 학교 대신 똥지게를 지고, 소 오줌이고 사람 똥이고 모아서 보리밭에 뿌리고, 그게 우리 밥줄이었으니. 할아버지는 참 신실한 분이었지. 산에 올라가 밤마다 하나님께 빈다고 기도하시던 분. 시장에 가셔도 꼭 과일 하나 사 오셔서 하나님께 드리고, 그 믿음이 내게도 전해졌어. 우리는 가난했지만, 그 안에 뭔가 든든한 게 있었어. 할아버지 덕에 땅도 조금 사고, 삶의 방향도 조금씩 나아갔지. 나는 학교도 못 마쳤고, 배운 것도 없지만, 하나님이 이 오천 땅에서 내게 맡기신 게 있었다고 생각해. 농사짓고, 교회 섬기고, 자식들 키우고, 그것으로 내 인생을 채웠지. 지금 돌이켜보면, 참 평범하고도 고마운 삶이었다네. 뭘 더 바라겠나, 나고 자란 마을에서, 믿음 지키며 살아온 것만으로도 감사하지.
친정은 대보 가는 길 대동배 발산 예스리라는 마을이다. 26세에 봉림불의 청년에게시집와서 2남1녀를 낳았다. 남편은 49세 되던 해에 세상을 떠났고 할머니 혼자 자녀를길러 결혼시켰다. 자녀들은 울산과 포항에 살고 있으며 손자녀들을 낳아 할머니를찾아온다. 시금치 농사를 하면서 농삿일을 덜 하지만 시금치 만지는 일을 하다가 허리가 굽었다고한다. 봉림마을 노인들은 다리가 일자로 곧은데 너구마을과 봉림불 노인들은 다리가 다 구부정하게 휘었다고 한다.
길가에서 밟히면서도 꿋꿋하게 살아가는 질갱이 꽃처럼, 고난 속에서도 흔들리며 다시 일어서고, 주님의 은혜 안에서 강하게 살아온 영덕읍교회 김연홍 권사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윤순덕 권사님은 어릴 때부터 청송교회를 다니며 신앙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당시에는 출석을 잘하면 도화지나 연필을 상으로 주어 친구들과 함께 교회를 다녔습니다. 철이 들면서 집에서 교회를 못 가게 말리기 시작했지만, '하나님이 항상 너를 본다'는 가르침 때문에 나쁜 짓을 해본 적이 없다고 회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