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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화원 PICK







"광야의 시간 끝에서, 다시 교회를 붙들다"

“나는 20년은 교회 안에서 자랐고, 40년은 광야에서 방황했습니다.” 남정우 장로는 자신의 인생을 두 구간으로 나누어 회고했다. 유년 시절부터 어머니 손을 붙잡고 다닌 교회, 그 익숙하고 따뜻했던 신앙의 품은 언제부턴가 그의 삶에서 멀어졌다. 서울로 상경한 뒤, 청년 시절과 군 복무, 그리고 결혼과 사업으로 이어지는 현실 속에서 그는 교회보다 바쁜 일상이 우선이 되었고, 그렇게 신앙은 ‘거리감’이 되어버렸다. “교회보다 등산 모임이 먼저였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았지만, 순종하지 못했죠.” 그러던 어느 날, 60을 앞둔 장로는 평소처럼 새벽 예배를 드린 후 출근길에 나섰다가 뜻밖의 교통사고를 겪는다. 차량은 전복되었지만, 그는 ‘기스 하나 없이’ 걸어 나왔다. “그 순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경고하셨구나.’ 죽을 수도 있었지만 살려주셨구나.” 그 사고는 그에게 다시 신앙으로 돌아올 계기가 되었고, 그는 그날 이후 새벽 예배를 한 번도 빠지지 않았다. “지금은 내가 먼저 주일을 지키고, 새벽을 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방식으로 저를 부르셨습니다.”

역경 속 피어난 믿음의 꽃

장성진 권사는 영양 일월에서 7남매 중 한 명으로 태어났습니다. 스무 살이 되던 해, 부모님의 뜻에 따라 흥구리로 시집을 오게 되었으나, 결혼 후 그녀의 삶은 곤궁의 연속이었습니다. 밥 짓기, 물 긷기, 손이 얼어붙도록 찬물에 빨래하기 등 온갖 집안일을 도맡아 해야 했습니다. 당시 흥구리는 100가구가 넘는 대촌으로, 한 집에 6~7명, 많게는 10명에 달하는 아이들을 키우는 것이 흔한 일이었습니다. 담배, 고추, 벼, 보리, 콩 등 모든 종류의 농사를 인력으로 직접 지으며 자녀 다섯 명(2남 3녀)을 키워야 했기에, 젊은 시절의 가장 큰 어려움은 경제적 궁핍과 고된 노동이었다고 전했습니다. 장을 보기 위해 아기를 업고 보따리를 이고 4km 떨어진 진보까지 걸어 다녀야 할 만큼 고단한 삶을 살았으며, 그녀의 고생 담은 책 10권으로도 부족하다고 말했습니다.

서천택 정순임 부부

천택씨는 이 마을 토박이이다. 청년 때 부산에 직장 생활하러 갔다가 순임씨를 만나 결혼했다. 결혼한 후 포항 연일로돌아와 살고 있는데 10년 전에 곡강에 사시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집을 비워 둘 수도 없고 고향생각도 나서 천택씨는 이 마을로 주민등록을 이전하고집을 지키고 있다. 그러나 지금도 생활근거는 연일에 두고 있으며 여기서 농사도 조금지으며 오가곤 한다. 2남2녀를 두었으며 다들 결혼하여 나가 살고 있다. 특히 차남이 미국에서 결혼하여 살고 있는데, 공부하러간다더니 거기서 자리를 잡아버렸다고 한다. 한 번 다니러 가고 싶은데. 아들 전화가 와서요즘 미국에 입국하는데 무슨 까다로운 심사를 한다는 소문이 있으니 노인들이 공항에서 고생할까 걱정된다면서 좀 있다가오시라고 했다고 한다.

이귀술 정병두 부부

영일정씨의 입향조는 정병두씨의 7대조였다. 이귀술씨는 경주시 강동면 단구리에서 이 마을로 시집와서 2남 1녀를 낳았다. 아들과 딸은 모두 결혼하여 포항과 영천에 살고 있으며 7명의 손자녀를 낳았다. 처음에는 오직 농사만 지었다. 포구가 없으므로 어업은 하지 않았고, 일시적으로 재첩이 잡혀서 재첩잡이를 해서 돈을 조금 번 적도 있었다. 그 뒤에는 해수욕장 배후마을로 민박업이 성행했다. 온 마을이 민박 손님을 받아서 바빴지만 재미가 있었다. 그러나 그 뒤 고속도로가 나면서 민박이 안 되기 시작했다.

파란만장한 삶 속 굳건한 신앙의 증인

김명순 권사님은 1944년에 태어나 올해 80대 중반의 연세이십니다. 권사님의 젊은 시절은 신앙생활과는 전혀 무관했습니다. 심지어 교회라는 단어조차 알지 못했고, 기도하는 방법도 전혀 몰랐다고 회고하십니다. 당시 권사님 가정에는 불교를 믿는 어른들이 계셨기 때문에, 교회는 절대로 발을 들여서는 안 되는 곳으로 인식하셨다고 합니다. 이러한 불교적 배경 속에서, 권사님은 스스로 미신을 지키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불교 어른들의 영향 아래 교회와는 완전히 단절된 삶을 사셨습니다. 권사님의 초기 삶은 청김면에서 시작되어 금막으로, 결혼 후 방전을 거쳐 현재의 흥구리 동네로 거처를 옮기는 과정을 겪으셨습니다. 먹고 살기 힘들었던 동네의 전반적인 어려움 속에서, 권사님은 이처럼 인생의 절반 이상을 하나님을 전혀 알지 못한 채 신앙 없는 삶을 살아가셨으며, 이는 훗날 찾아올 극적인 신앙 체험의 배경이 됩니다.

시간은 흐르고 사랑은 남는다

감꽃 , 홍시처럼 달콤한 영덕읍교회 이수자 집사님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