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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화원 PICK







파란만장한 삶 속 굳건한 신앙의 증인

김명순 권사님은 1944년에 태어나 올해 80대 중반의 연세이십니다. 권사님의 젊은 시절은 신앙생활과는 전혀 무관했습니다. 심지어 교회라는 단어조차 알지 못했고, 기도하는 방법도 전혀 몰랐다고 회고하십니다. 당시 권사님 가정에는 불교를 믿는 어른들이 계셨기 때문에, 교회는 절대로 발을 들여서는 안 되는 곳으로 인식하셨다고 합니다. 이러한 불교적 배경 속에서, 권사님은 스스로 미신을 지키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불교 어른들의 영향 아래 교회와는 완전히 단절된 삶을 사셨습니다. 권사님의 초기 삶은 청김면에서 시작되어 금막으로, 결혼 후 방전을 거쳐 현재의 흥구리 동네로 거처를 옮기는 과정을 겪으셨습니다. 먹고 살기 힘들었던 동네의 전반적인 어려움 속에서, 권사님은 이처럼 인생의 절반 이상을 하나님을 전혀 알지 못한 채 신앙 없는 삶을 살아가셨으며, 이는 훗날 찾아올 극적인 신앙 체험의 배경이 됩니다.

서천택 정순임 부부

천택씨는 이 마을 토박이이다. 청년 때 부산에 직장 생활하러 갔다가 순임씨를 만나 결혼했다. 결혼한 후 포항 연일로돌아와 살고 있는데 10년 전에 곡강에 사시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집을 비워 둘 수도 없고 고향생각도 나서 천택씨는 이 마을로 주민등록을 이전하고집을 지키고 있다. 그러나 지금도 생활근거는 연일에 두고 있으며 여기서 농사도 조금지으며 오가곤 한다. 2남2녀를 두었으며 다들 결혼하여 나가 살고 있다. 특히 차남이 미국에서 결혼하여 살고 있는데, 공부하러간다더니 거기서 자리를 잡아버렸다고 한다. 한 번 다니러 가고 싶은데. 아들 전화가 와서요즘 미국에 입국하는데 무슨 까다로운 심사를 한다는 소문이 있으니 노인들이 공항에서 고생할까 걱정된다면서 좀 있다가오시라고 했다고 한다.

김난기권사님

나는 어려서부터 부족함 없이 살았어요. 친정이 꽤 잘살았거든요. 배고픔이 뭔지도 모르고 자랐어요. 그런데 결혼하고 시집을 오니, 세상이 달랐어요. 땅을 일구는 개간부터 시작해서, 담배농사며 마늘이며 안 해본 일이 없었어요. 아침부터 밤까지 손에 흙을 묻히고 살았죠. ‘시집이란 게 원래 이런 건가’ 싶을 정도로 고됐어요. 특히 담배농사는 고된 일 중의 고된 일이었어요. 담배잎을 심고, 따고, 말리고, 다시 다듬고… 온종일 허리를 굽힌 채 일하느라 허리가 휘었어요. 쉬는 날이란 건 없었어요. 명절에도 시어른들 챙기랴, 일하랴 정신이 없었지요. 친정에서 느꼈던 여유로운 삶과는 너무 달랐어요. 몸도 마음도 지쳐갔지요. 그 시절을 돌이켜보면, 나를 지탱해 준 건 ‘해야 한다’는 책임감이었어요. 어린 시절 잘살았다고 해서 세상 물정 모르는 게 아니라, 오히려 시집살이하며 철이 들었어요. 아무리 힘들어도 ‘내가 무너지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하루하루 버텼어요. 지금도 그 시절을 떠올리면 눈물보다 한숨이 먼저 나와요. 하지만 그 모든 시간이 지나고 나니,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게 없다는 걸 깨달아요. 내가 겪은 고생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고,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을 심어줬어요. 그래서 지금은 말할 수 있어요. “그때는 힘들었지만, 하나님께서 다 아시고 함께 하셨습니다.”

말썽쟁이 아빠의 미국생활

가족사진…. 큰아들 벤자민 워싱턴아시아태평양변호사협회 회장 취임식에서 …

김판돌 김춘라 부부

춘라씨는 봉림불 청년이고 판돌씨는 너구마을 처녀일 때 연애를 했다. 연애 중에 군대에 갔고 월남에 맹호부대로 파견되었다가 제대하고 결혼했다. 2남1녀를 낳았고 모두 결혼하여 포항에 나가 살면서 5명의 손자녀를 낳았다. 처음에는 쌀농사와 시금치 농사를 지었다. 해수갑문이 설치되어 경제적으로 호전되었다. 해수욕장이 생긴 것은 경제적으로 아무 영향이 없었다. 20년 전부터 시금치 농사를지어 현금수입이 늘어났다. 그러나 10년 전쯤부터는 시금치에 연작의 해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같은 땅에 여러 해 동안 같은 작물을 생산하니 땅이 피로해지는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지금은 수확이 전만 못하다. 계절에 따른 특별한 동네 행사는 없고 정월 보름날 모여서 윷을 놀고 마을 회의를 하는 정도는 하고 있다.

엄필선권사님

나는 1937년에 낙평에서 태어났어요. 그때는 다들 가난했지만, 서로 도우며 따뜻하게 살았지요. 아버지는 농사일에 성실하셨고, 어머니는 조용히 집안을 돌보셨어요. 형제들이 많아 밥상에 둘러앉으면 늘 북적였고,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어요. 나는 어릴 적부터 조용하고 얌전한 아이였어요. 말수는 적었지만, 어른들 말씀은 잘 들었고, 물 긷고 나무하고 동생들 돌보는 일이 익숙했지요. 학교는 3학년까지 다녔지만, 배운 글씨 덕에 지금도 성경 읽을 수 있어 참 감사해요. 그 시절엔 전기도 없고, 비 오면 처마 밑에서 빗소리 들으며 쉬었지요. 명절 때 먹는 찰밥 한 그릇, 새 고무신 한 켤레가 그렇게 기쁘고 귀했어요. 가난했지만 서로 아껴주며 살았고, 그때 배운 성실함과 감사하는 마음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