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자 씨

성자씨는 이 동네에서 나고 자라 남편도 여기서 만났다. 남편이 3살 많다. 딸 1명에 아들 2명을 낳았다. 자녀들은 장성동에 살며 일주일에 몇 번씩 오고간다. 옛날에는 낮에 일하고 밤에 처자총각들이 모여 다른 동네 처자총각들한테 놀러다녔다고 한다. 부모님과 오라비들이 무서워 눈피해서 다녔는데 그렇게 함께 노는 게 재미있었다. 마을에서 살며 예전부터 지금까지 계속 농사를 짓고 있다. 일하는 게 힘들었지만 돈 벌어서 자식을 키우니 즐거웠다. 자식들과 함께 살 때 자식들 덕에 즐거웠는데 지금은 다 나가고 남편과 둘이 있으니 서운하다. 마을에 연세 많으신 분들이 오래오래 건강하게 잘 계시다가 돌아가시면 좋겠고 마을 전체가 단합이 잘 되었으면 좋겠다고 하신다.

안춘선 할머니

할머니는 이 동네에서 나고 자라 여기서 시집을 갔다. 딸 1명과 아들 3명을 낳았다. 아들 딸 모두 죽천초등학교를 다녔다. 모두 결혼하여 다른 지역에 산다. 남편도 세상을 떠나고 자식들도 결혼해 나가면서 현재는 혼자 지낸다. 한 번씩 둘째아들이 있는 경기도에서 지내기도 하고 딸집에 두어 달 가있기도 한다. 자식들이 왔다가 이렇게 명절 지나고 다 가고나면 섭섭하고 허전하다고 한다. 원래는 농사일하고 소도 키우셨다. 자식들이 나이가 일흔이 넘으면 힘드니 농사를 짓지 말라고 해서 논과 밭을 남에게 주었다. 소는 남편이 돌아가시면서 접었다. 할머니는 일하며 자식들 공부시키는 게 가장 좋았다. 자식들이 용돈을 달라고 하면 일하다가도 내버리고 오토바이 타고 가서 돈을 줬다고 한다. 할머니는 너무 오래 살다가 요양원가서 자식들 애먹이고 싶진 않다며 적당히 살다가면 좋겠다고 한다. 교회나 절이나 똑같다며 어디를 가나 본인이 착하게 살면 하나님이건 부처님이건 다 알지 않겠냐고 하신다.

정희숙 할머니

할머니는 이 마을에서 태어나 다가 중매로 동네 오빠와 혼했다. 아들 3명과 딸 3명을낳았다. 자녀들은 다 결혼해서 잘살고 있다. 남편은 마을에 저수지를 만들 때 일을 했다. 막내가 10살이 되었을 때 세상을 떠났다. 할머니는 시금치를 팔아서 자녀들을 길렀다. 다른 건 바라지 않고 자녀들이 지금처럼 잘 사는 걸 바란다. 요새는 아무것도 안하면 심심하니 이웃을 도와주는 겸 소일거리를 하며 지낸다.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다며 자는 잠에 죽으면 좋겠다고 하신다.

박연희 할머니

고향은 홍해 마산동이다. 시집을 이 마을로 와 딸 5명에 아들을 2명 낳았다. 흥해에 비해 여건이 좋지 않아 시집살이를 고되게 하셨다. 흥해에는 전기가 들어왔는데 이 마을에는 전기가 안 들어와 호롱불 밑에서 뜨개질을 했다. 우물이 멀어 머리에 20리터정도 되는 물을 이고 다녀야 했다. 곡강 시금치가 효자상품이 되며 사는 게 나아졌다고 한다. 하지만 본인은 시금치반찬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할머니는 딸만 낳다가 뒤늦게 아들을 낳았다. 아들을 너무 늦게 낳아 젖이 얼마 안나서 젖을 못 먹이는 데 아이가 젖 말고 다른 음식을 먹지 않아 애를 먹었다. 안영예권사님이 아들에게 젖을 먹여주어 아이를 길렀다. 지금은 아들이 옆집에 가서 자신이 젖을 얻어먹고 살아 덕분에 키가 이만큼 컸다고 면서 권사님한테 고맙다고 매년 세배를 다닌다. 할머니는 자식들이 잘되는 게 소원이다. 항상 자녀들이 잘되기를 빈다.

배봉순 할머니

고향은 대신동이고 20살에 곡강으로 한 살 어린 남편에게 시집왔다. 남편은 결혼 당시19살이었다. 자녀는 딸 2명에 아들 3명을 낳았다. 권사님은 자식들이 장성해 어른이되었을 때 가장 기뻤고 자식들이 아팠을 때 가장 힘들었다. 지금은 혼자 집에 살지만 예전에 한동대 학생들이 자취를 했다. 김병관, 이완, 김아람이 살았는데 참 예쁜 아이들이었다. 다공부를 잘하고 착하고 어른 스러웠다. 원래는 절에 다녔는데 그 학생들을 따라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 권사님은 심장이 아파 수술을 했다고 한다. 그 때문에 한동안 거동이 불편했다.

편차생 할머니

편차생권사님은 신광 만석에서 23살에 정영규씨에게 곡강으로 시집왔다. 아들 2명 딸1명을 낳았다. 큰 아들은 젊을 때 죽었고 둘째 아들이 정승락 집사이다. 둘째 아들은어려서 달리기도 잘 하고 공도 잘 찼다고 한다. 기계과 공대를 가서 기계 고치는 일을잘한다. 남편 정영규 집사님은 먼저 세상을 떠났다. 남편이 이장이었는데 새마을 사업을 해서 일을 많이 했다. 길 만들고 창고 짓고 동네경지정리를 하여 마을이 상도 탔다. 그 때는 여자 부인들도 나와서 일을 했고 아카시아나무를 심어 팔아서 돈을 벌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