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1946년, 영덕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한 번도 이 마을을 떠난 적이 없어요. 요즘은 다들 도시로 나가 사는 걸 당연히 여기지만, 나는 그래 본 적이 없어요. 어릴 적 우리 집은 바다가 바로 보이는 곳에 있었지요. 동쪽 문을 열면 바다에서 해가 쭉 올라오는 게 보였고, 그 모습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어요. 그게 내 인생 첫 기억이자, 지금도 가끔 생각나는 풍경이에요. 우리 부모님은 부지런한 분들이셨어요. 밭일도 하고, 장에도 다니고, 집안도 잘 돌보셨지요. 어머니는 무뚝뚝하지만 속정 깊은 분이셨고, 아버지는 늘 묵묵히 일만 하셨던 기억이 나요. 형제자매는 많았고, 나는 그 중에서도 얌전한 아이였어요. 시끄럽게 나서지도 않았고, 말도 많지 않았지요. 그냥 시키는 일 묵묵히 하고, 동네에서 조용히 지내던 아이였어요. 그 시절엔 뭐든 손으로 해야 했지요. 물 긷고, 장작 패고, 논밭일도 도와야 했고. 학교는 초등학교만 다녔고, 더 배우고 싶단 마음도 있었지만 형편이 안 됐어요. 대신 삶을 배웠지요. 어른들 하는 말 귀담아 듣고, 몸으로 도우면서, 나도 자연스럽게 사람 사는 법을 익혔어요. 지금 돌이켜보면, 그 바닷가 집이 내 인생의 시작이자 믿음의 씨앗이 뿌려진 곳 같아요. 그 시절은 비록 어렵고 가난했지만, 정직하고 순박한 마음으로 살았기에 더 따뜻했지요. 나는 지금도 그 집을 생각하면 마음이 편안해져요. 바다가 보이던 그 집에서, 내 인생은 그렇게 시작됐어요.
나는 경상북도 영덕군 매정이라는 마을에서 태어났어. 그 마을은 말 그대로 ‘믿음의 마을’이었지. 마을 주민들 거의 전부가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었고, 주일 아침이면 종소리만 울려도 알아서 예배당으로 발걸음을 옮겼어. 아이고, 그때는 예배 빠지는 사람 찾는 게 더 어려울 정도였으니까. 우리 집도 예외가 아니었지. 아버지는 시골 농부였지만, 믿음으로 단단하신 분이었어. 새벽이면 꼭 기도로 하루를 시작했고, 주일엔 손에 뭐 들고 나가는 일은 절대 없었어. 장을 보러 가는 것도 금기였고, 바느질 하나도 안 했어. 그만큼 주일은 거룩한 날로 여겼지. 나는 그런 분위기 속에서 자라서 그런지, 예배와 기도, 찬송이 자연스러웠고, 교회는 내 숨 쉴 곳 같았어. 지금도 생각나. 우리 어머니가 된장국 하나 끓이는 것도 토요일 밤에 다 해놓고, 주일 아침엔 그저 데우기만 했지. 그게 믿음이었고, 하나님을 향한 예의였어. 아이들 옷도 다려놓고, 새 신발 신기고, 단정하게 머리 빗겨서 교회 보내는 그 모습이 눈에 선해. 그런 집안에서 컸으니, 믿음이라는 게 따로 배운 게 아니라 그냥 몸에 밴 거야. 나는 그 시절이 너무 고맙고, 그 마을이 그리워. 사람들 다 가난했지만, 마음만큼은 넉넉했고, 어려울수록 더 기도하고 서로 도왔어. 믿음이 뿌리처럼 마을에 내려 있었던 거지. 그 믿음의 땅에서 자란 나는 지금도 그 향기를 잊지 못해. 신앙은 가르치는 게 아니라, 보여주는 거라는 걸 나는 매정 마을에서 배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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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로드중입니다.나는 영덕군 지품면 오천2리에서 태어나서, 지금까지 쭉 이 마을을 떠난 적이 없네. 태어난 집도 여기, 지금 살고 있는 집도 여기지. 어릴 적엔 오천1리 쪽에 큰집이 있어서 형제들하고 같이 살다가, 내가 살림을 차리면서 이쪽으로 내려왔지. 그래서 내 삶의 시작도, 끝도 오천이 될 것 같아. 형제는 일곱 남매였는데, 난 그중 셋째였어. 그 시절엔 형제 많은 집이 흔했지. 형님은 참 똑똑했어, 그 시절에 대학교까지 다녔으니까. 근데 나는... 6학년 2학기 때 학업을 멈췄지. 6.25 전쟁이 터지고, 아버지 돌아가시고, 할아버지가 우리를 이끄셨거든. 학교 대신 똥지게를 지고, 소 오줌이고 사람 똥이고 모아서 보리밭에 뿌리고, 그게 우리 밥줄이었으니. 할아버지는 참 신실한 분이었지. 산에 올라가 밤마다 하나님께 빈다고 기도하시던 분. 시장에 가셔도 꼭 과일 하나 사 오셔서 하나님께 드리고, 그 믿음이 내게도 전해졌어. 우리는 가난했지만, 그 안에 뭔가 든든한 게 있었어. 할아버지 덕에 땅도 조금 사고, 삶의 방향도 조금씩 나아갔지. 나는 학교도 못 마쳤고, 배운 것도 없지만, 하나님이 이 오천 땅에서 내게 맡기신 게 있었다고 생각해. 농사짓고, 교회 섬기고, 자식들 키우고, 그것으로 내 인생을 채웠지. 지금 돌이켜보면, 참 평범하고도 고마운 삶이었다네. 뭘 더 바라겠나, 나고 자란 마을에서, 믿음 지키며 살아온 것만으로도 감사하지.
나는 1949년 충청남도 아산에서 태어났어. 솔직히 말하면, 어린 시절은 참 힘들었어. 6.25 전쟁 직후라 먹을 것도 부족했고, 배고픈 게 일상이었지. 그나마 박정희 대통령 시절부터 밀가루 배급이 나오면서 좀 나아졌어. 아버지는 내가 중학교 때 돌아가셨고, 어머니랑 여동생이랑 셋이 살았지. 어린 나이에 가장이 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더라고. 그래서 20살 때부터 광산에서 일하기 시작했어. 그때부터 그냥 앞만 보고 살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