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하기

인생화원 PICK







박성호집사님

나는 1936년 낙평에서 태어났어요. 우리 부모는 자식이 많았지요. 나 포함해서 열 명이나 되었는데, 지금 살아 있는 사람은 나 하나뿐이에요. 그땐 약도 없고 병원도 멀어서 아이들이 태어나도 오래 못 사는 경우가 많았어요. 나도 어릴 적에 심하게 아팠던 적이 있는데, 살아남은 게 기적이라니까요. 그 시절은 참 가난했어요. 먹을 것도 부족했고, 입을 옷도 늘 모자랐지요. 흙바닥에서 맨발로 뛰놀았고, 하루 두 끼도 제대로 못 챙겨 먹을 때가 많았어요. 그래도 마을 사람들끼리는 서로 도우며 살았고, 그 안에서 웃음도 있었어요. 어려운 가운데서도 부모님은 부지런하고 성실했어요. 덕분에 나도 일찍 철이 들었지요. 나는 어릴 때부터 일하는 걸 배웠어요. 들에 나가 김을 매고, 물 길러 다니고, 겨울엔 장작 패고… 어린 나이에 어른들이 하는 일을 따라 했어요. 그게 자연스럽게 몸에 익었지요. 지금 생각하면 힘들었지만, 그때 배운 성실함이 지금까지도 남아 있는 것 같아요. 형제들은 다 먼저 떠났지만, 나는 지금도 그 아이들 얼굴이 기억나요. 같이 뛰놀던 동생들, 병석에 누워 있던 누이… 가끔 그들을 떠올리면 마음이 뭉클해요. 살아남았다는 게 감사하면서도, 그만큼 잘 살아야겠다는 마음이 늘 있었어요. 그래서 지금도 하루하루 성실히 살려고 해요. 살아 있다는 게 감사한 일이니까요.

엄필선권사님

나는 1937년에 낙평에서 태어났어요. 그때는 다들 가난했지만, 서로 도우며 따뜻하게 살았지요. 아버지는 농사일에 성실하셨고, 어머니는 조용히 집안을 돌보셨어요. 형제들이 많아 밥상에 둘러앉으면 늘 북적였고,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어요. 나는 어릴 적부터 조용하고 얌전한 아이였어요. 말수는 적었지만, 어른들 말씀은 잘 들었고, 물 긷고 나무하고 동생들 돌보는 일이 익숙했지요. 학교는 3학년까지 다녔지만, 배운 글씨 덕에 지금도 성경 읽을 수 있어 참 감사해요. 그 시절엔 전기도 없고, 비 오면 처마 밑에서 빗소리 들으며 쉬었지요. 명절 때 먹는 찰밥 한 그릇, 새 고무신 한 켤레가 그렇게 기쁘고 귀했어요. 가난했지만 서로 아껴주며 살았고, 그때 배운 성실함과 감사하는 마음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어요.

천음전권사님

나는 어려서부터 공부랑은 인연이 없었어. 학교에 보내줘도 앞문으로 들어갔다가 뒷문으로 도망치기 일쑤였지. 아버지는 그런 나를 붙잡아 오느라 진땀을 흘리셨고, 결국엔 "얘는 안 되겠다" 하시고 일찍 시집보내기로 결심하셨지. 학교라고는 도합 30일 다녔을까? 이름 석 자 쓰는 것도 겨우였으니 말 다 했지. 그런 내가 지금 교회 권사로 40년 넘게 신앙생활을 했다고 하면, 사람들은 놀라. 하지만 난 가끔 생각해. "그때 공부 안 한 게 하나님 뜻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만약 공부를 했더라면, 이 길로 들어서지 않았을지도 모르거든. 내 삶엔 지식보다 믿음이 먼저 들어왔고, 그 믿음이 지금까지 나를 이끌어왔어. 어릴 땐 울진에서 살다가 부산도 가고, 영양도 거쳐 시집을 왔어. 참 유난한 길을 걸어왔지. 남들처럼 정규 교육을 받은 건 아니지만, 나는 삶으로 배웠고, 고난으로 익혔고, 하나님 앞에서 무릎 꿇으며 지혜를 배웠어. 나처럼 학교 못 다닌 사람도 하나님께 쓰임받을 수 있다는 걸, 나는 증명하고 싶었어. 지금 와서 돌아보면, 그 시절 그렇게 공부와 멀어진 것도 감사한 일이야. 하나님이 나를 따로 부르신 거니까. 난 책상 앞에 앉기보단, 예배당 바닥에 무릎 꿇는 법을 먼저 배웠고, 칠판보다 성경 말씀이 더 익숙한 삶을 살아왔지. 그게 내 길이고, 내가 받은 복이었어. 사람들은 배움이 없으면 못 한다고 하지만,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어. "믿음 하나면 충분하다." 내 인생엔 그 믿음이 있었고, 그 믿음이 나를 여기까지 데려다 줬다네.

김화자권사님

업로드중입니다.

윤국환장로님

나는 금곡에서 태어났고, 지금도 금곡에서 살고 있어요. 어릴 땐 이 시골이 너무 좁고 답답하게 느껴졌어요. 그래서 젊은 날엔 도시로 나갔고, 사업도 하고, 인생의 바다를 참 많이 헤맸지요. 그런데 돌고 돌아 다시 금곡으로 돌아왔을 땐, 이 땅이 얼마나 귀하고 편안한지 새삼 깨달았어요. 고향에서의 어린 시절은 가난했지만 정이 있었어요. 친구들과 산에서 뛰놀고, 들에서 일 도우며 컸어요. 어른들 말씀은 무섭기도 했지만 그만큼 삶을 배울 수 있었죠. 그때 배운 순종과 성실이 제 인생의 밑바탕이 되었어요. 도시에서 오래 살다 보니 마음도 거칠어지고, 세상 욕심도 많아졌어요. 사업이 잘될 땐 세상이 내 것 같았지만, 무너질 땐 참 처참했지요. 그렇게 한계에 부딪힌 어느 날, 마음속에 이런 생각이 스쳤어요. "돌아가자. 하나님께로, 고향으로." 그렇게 다시 금곡으로 돌아왔어요. 낡은 집을 고쳐 살고, 밭을 일구고, 말씀을 붙잡고 기도하기 시작했죠. 젊을 땐 몰랐던 은혜를 이제야 알겠더라고요. 내 삶의 시작과 끝, 그 중심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걸요. 고향은 단순한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다시 불러주신 자리였어요.

이북암장로님

나는 초등학교 시절, 담임 선생님의 손에 이끌려 교회라는 곳에 처음 발을 들였다네. 그때가 아마 내 인생에 있어서 가장 조용한 초대장이었지. 예배당에 처음 들어선 날, 마음이 참 따뜻했어. 그날 배운 찬송이 아직도 내 가슴에 깊이 남아있네. "고요한 바다로"라는 찬송인데, 그 찬송은 내 삶의 풍랑과 평안을 함께 담고 있었어. 처음엔 가사도 잘 모르고 멜로디만 따라 불렀는데, 세월이 흐르고 나서야 그 찬송의 깊은 뜻을 깨달았지. "큰 풍랑 일어나 나 쉴 곳 없어도 주 예수 함께 하시네" 그 가사 한 구절이 지금도 내 귀에 맴돌아. 인생이라는 게 늘 잔잔한 물결만 있는 게 아니잖아. 살다 보면 큰 풍랑도 만나고, 쉴 곳 없이 헤매는 날도 많아. 그런데 그럴 때마다 나는 그 찬송을 떠올리며 위로를 받았지. 내가 특별히 노래를 잘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누가 신앙의 첫 걸음을 어떻게 내디뎠냐고 물으면 꼭 이 찬송부터 이야기하게 된다네. 그 시절 나는 그냥 좋으니까, 예배당 나가고 찬송 부르고 그랬지. 무슨 깊은 신학이나 교리 같은 건 몰랐어. 그저 따뜻한 사람들이 있었고, 기도하는 어른들이 있었고, 아이들 웃음소리가 가득한 그 공간이 좋았던 거야.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게 은혜였어. 하나님이 내 마음을 조용히 두드리셨고, 나는 순전히 그 마음에 끌려 갔던 거지. 지금도 종종 그때 불렀던 찬송을 혼잣말처럼 흥얼거릴 때가 있어. 바람이 세차게 부는 날이면 특히 그래. 인생을 돌아보면, 참 많은 풍랑이 있었고, 또 그만큼의 고요함도 있었지. 그런데 그 모든 순간에 주님이 나와 함께 하셨다는 걸, 이제는 확실히 말할 수 있어. 그렇게 내 신앙의 첫 발걸음은, 조용히 그러나 분명히 찬송과 함께 시작되었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