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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화원 PICK







김성자 씨

신광면에서 태어나 동해면으로 시집을 가서 살다가 여기로 왔다. 친정이 큰집이라 매일 고기반찬을 하고 손님도 많이 와서 좋았는데 커서 보니 매일 상 차리고 제사지내느라 친구들과 놀 시간도 없어 힘들었다. 물도 멀리서 이어와야 했는데 물 길어 밥하고 설거지하느라 고생했다. 그 때문에 성자씨는 부잣집이나 맏이에게는 절대로 시집을 안 가겠다며 당시에 좋은 사람들 중신 들어온 걸 마다하고 이 집에 시집을 왔다. 처녀때부터 오빠를 따라 교회에 다녔는데 당시 다니던 교회의 목사님이 중신을 해주었다. 남편은 9남매 중 둘째였는데 시어머니가 소아마비로 몸 한쪽을 잘 못 쓰는 분이었다. 시어머니가 장가간 큰형님이랑 살겠다고 했는데 큰형님네 부부가 시어머니를 모시지않겠다고 하여 성자씨가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다. 시어머니를 모시면서 시동생과 시누이를 돌보고 학교를 보내고 시집 장가를 다 보냈다.

손종난 김돌식 부부

할머니는 용화사 절에서 태어나 못 근처 답다리에서 자랐다. 친아버지 고향은 영천고경인데 답다리로 이사를 와 온 가족이 거기서 살다가 자신이 여기로 시집오고나머지 식구들은 죽천으로 갔다. 할아버지는 7남매 중 종손으로 이 마을에서 태어나고자랐다. 부부는 1남 2녀를 두었다. 손종난 할머니는 시집을 일기로 적으면 참 지긋지긋할 정도로 고생을 했다. 논농사를 짓고 소를 몰면서 시어머니와 시할머니를 모셨고 시동생(남자)이 3명이고 시누부(여자)가 3명이었는데 모두 할머니가 길러서 학교를 보냈다.

김돌식 손종난 부부

할머니는 용화사 절에서 태어나 못 근처 답다리에서 자랐다. 친아버지 고향은 영천고경인데 답다리로 이사를 와 온 가족이 거기서 살다가 자신이 여기로 시집오고나머지 식구들은 죽천으로 갔다. 할아버지는 7남매 중 종손으로 이 마을에서 태어나고자랐다. 부부는 1남 2녀를 두었다. 손종난 할머니는 시집을 일기로 적으면 참 지긋지긋할 정도로 고생을 했다. 논농사를 짓고 소를 몰면서 시어머니와 시할머니를 모셨고 시동생(남자)이 3명이고 시누부(여자)가 3명이었는데 모두 할머니가 길러서 학교를 보냈다.

이정애 강흥수 부부

흥수씨 부부는 포항 시내에서 살다가 집을 지어 곡강에 왔다. 자녀는 딸 1명에 아들 1명을 두었다. 딸은 시집갔고 아들은 직장 다닌다. 처음 곡강에 왔을 때는 잠이 안 올 정도로 좋았다고 한다. 이 집이 당시 동네에서 유일한 2층집이었는데 매우 신경써서 지은 집이었고 공장이 하나도 없어서 경치도 좋았다. 그때는 농사도 짓지 않았다. 흥수씨는 원래 현대중공업에서 10년 가까이 엔지니어로 일했는데 IMF가 터지고 회사에서 퇴직하면서 98년도에 버섯농장을 시작 했다. 정애씨는 남편이 버섯을 키우자고 했을 때 대책이 없으니 어쩔 수 없이 같이 시작했다고 한다. 버섯을 기를 때 온도, 습도를 잘 맞춰야 하는데 잘못 해서 버섯이 다 죽기도 했다. 온갖 고생 끝에 방법을 터득해서 지금은 농사 경력이 20년 된다. 환풍기 시설, 공중에서 움직이는 트레일러 등 농장설비를 흥수씨가 손으로 만들었다.

강흥수 이정애 부부

흥수씨 부부는 포항 시내에서 살다가 집을 지어 곡강에 왔다. 자녀는 딸 1명에 아들 1명을 두었다. 딸은 시집갔고 아들은 직장 다닌다. 처음 곡강에 왔을 때는 잠이 안 올 정도로 좋았다고 한다. 이 집이 당시 동네에서 유일한 2층집이었는데 매우 신경써서 지은 집이었고 공장이 하나도 없어서 경치도 좋았다. 그때는 농사도 짓지 않았다. 흥수씨는 원래 현대중공업에서 10년 가까이 엔지니어로 일했는데 IMF가 터지고 회사에서 퇴직하면서 98년도에 버섯농장을 시작 했다. 정애씨는 남편이 버섯을 키우자고 했을 때 대책이 없으니 어쩔 수 없이 같이 시작했다고 한다. 버섯을 기를 때 온도, 습도를 잘 맞춰야 하는데 잘못 해서 버섯이 다 죽기도 했다. 온갖 고생 끝에 방법을 터득해서 지금은 농사 경력이 20년 된다. 환풍기 시설, 공중에서 움직이는 트레일러 등 농장설비를 흥수씨가 손으로 만들었다.

원연호 할아버지

이 마을이 고향이다. 200년 넘게 현재 사는 터에 살았다. 집터에 아름드리 포구나무가 있었는데 새마을사업 하면서 길 낸다고 베어버렸다. 할아버지는 70년도에 이장을 했다. 그때가 새마을 사업 시작할 때다. 정부에서 시멘트를 335포를 줬는데 시멘트를 동네 크기에 상관없이 똑같이 줬더니 어떤 사람이 시멘트를 빼돌리는 부정을 저질렀다고 신고해 경찰서에 불려가기도 했다. 당시 마을 사람들은 주로 논농사와 밭농사를 지었다. 못이 생기기 전에는 면적만 넓었지 쓸 만한 땅은 없고 흉년도 잦았다. 먹을 게 없으니 소나무 껍질을 먹기도 했다. 이장을 하던 당시에 곡강 2동이 120호 넘는 제일 큰 마을이었는데 먹을 게 없어 타지로다 나가고 지금은 한 60호 밖에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