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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화원 PICK







배봉순 할머니

고향은 대신동이고 20살에 곡강으로 한 살 어린 남편에게 시집왔다. 남편은 결혼 당시19살이었다. 자녀는 딸 2명에 아들 3명을 낳았다. 권사님은 자식들이 장성해 어른이되었을 때 가장 기뻤고 자식들이 아팠을 때 가장 힘들었다. 지금은 혼자 집에 살지만 예전에 한동대 학생들이 자취를 했다. 김병관, 이완, 김아람이 살았는데 참 예쁜 아이들이었다. 다공부를 잘하고 착하고 어른 스러웠다. 원래는 절에 다녔는데 그 학생들을 따라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 권사님은 심장이 아파 수술을 했다고 한다. 그 때문에 한동안 거동이 불편했다.

편차생 할머니

편차생권사님은 신광 만석에서 23살에 정영규씨에게 곡강으로 시집왔다. 아들 2명 딸1명을 낳았다. 큰 아들은 젊을 때 죽었고 둘째 아들이 정승락 집사이다. 둘째 아들은어려서 달리기도 잘 하고 공도 잘 찼다고 한다. 기계과 공대를 가서 기계 고치는 일을잘한다. 남편 정영규 집사님은 먼저 세상을 떠났다. 남편이 이장이었는데 새마을 사업을 해서 일을 많이 했다. 길 만들고 창고 짓고 동네경지정리를 하여 마을이 상도 탔다. 그 때는 여자 부인들도 나와서 일을 했고 아카시아나무를 심어 팔아서 돈을 벌었다고 한다.

이임생씨

우각에서 22살에 곡강으로 시집을 왔다. 딸 2명에 아들을 1명 낳았다. 어렸을 때부터 재미있게 지내기 보다는 그저 묵묵히 일만 하며 살았다고 한다. 이 마을에 와서 시금치로 음식을 많이 해먹었다. 시금치를 삶아서 먹고 시금치를 갈아서 수제비로 해 먹고 시금치국도 많이 먹었다. 그런데 국은 들큰해서 별로라고 한다.

황영백 이석분 부부

황영백 장로님은 죽장면 상옥 출신이고 이석분 권사님은 신광면 우각 출신인데 두분은 울산에서 만나 72년도에 결혼했다. 원래 황장로님이 이혼을 하고 전처소생이 있었고 권사님은 어릴 때 사고로 오른손이 불편했는데, 울산에서 동서가 중매를 해서 결혼을 했다. 현재 사는 곳이 외가였는데 결혼해서 인사를 하러 외가에 와서 보니 마을에 교회가 있었다. 여기 와서 약한 교회 섬기면서 살면 좋겠다고 생각해 이 마을에 이사를 왔다고 한다. 이사 와서 곡강교회를 다니는 동안 교회건물을 두 번 지었다. 처음 왔을 때 교회가 너무 허술하고 교인도 없었고 김용호장로님 가정이 교회를 붙잡고 있었다. 김용호장로님 혼자 교회를 섬길 때 교회가 문을 닫았다가 열었다가 아주 어려웠다. 마침 부흥회를 하고 새마을바람에 벽돌도 찍고 해서 교회를 지었다. 그 뒤 다시 교회를 지을 때는 논밭을 팔아서 짓기 시작했는데 김종배장로님이 곡강교회로 와서 크게 도움이 되었다. 그후 차차 한동대 학생들도 오면서 교회가 이만큼 발전하고 식구가 늘었다.

남옥녀 이등질 부부

이등질 회장은 12대조 대에 입향한 이 마을의 토박이이고 부인 옥녀씨는 24세에 혼인하여 들어왔다. 지금까지 2남을 낳아 길렀는데 맏아들은 포항에 나가 살고 작은 아들은 부천에서 회사에 다니고 있다. 어린 시절에는 마을 앞들이 거의 삼분지 일이나 반가량이 갈밭이거나 늪이었다. 저습지가 바다보다 1.5m 높고 하단에 갑문이 없었으니 작은 해일에도 해를 입었고 봉림 앞까지는 늘 바닷물이 드나들었다. 1960년대에도 개간촉진을 위해 많은 노력을 했으나 잘 되지 않았고, 상주에서 온 사람이 저습지를 간척 해서 농사를 지으려다가 실패하기도 했다.

이등질 남옥녀 부부

이등질 회장은 12대조 대에 입향한 이 마을의 토박이이고 부인 옥녀씨는 24세에 혼인하여 들어왔다. 지금까지 2남을 낳아 길렀는데 맏아들은 포항에 나가 살고 작은 아들은 부천에서 회사에 다니고 있다. 어린 시절에는 마을 앞들이 거의 삼분지 일이나 반가량이 갈밭이거나 늪이었다. 저습지가 바다보다 1.5m 높고 하단에 갑문이 없었으니 작은 해일에도 해를 입었고 봉림 앞까지는 늘 바닷물이 드나들었다. 1960년대에도 개간촉진을 위해 많은 노력을 했으나 잘 되지 않았고, 상주에서 온 사람이 저습지를 간척 해서 농사를 지으려다가 실패하기도 했다.